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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Oct 17. 2017

가을우체국





시골로 간 보아,
의연하게 그려낸 사랑과 때이른 죽음





[리뷰&현장] 영화 <가을우체국> 언론시사·기자간담회



쓸쓸하고 풍요한 아이러니의 계절이다. 가을의 도시풍경은 쓸쓸함에 가깝지만 시골 풍경은 풍요함에 보다 가깝다. 논과 밭에선 1년의 결실들이 익어간다. 비록 나무들은 앙상하게 말라가지만 도시 나무들보다 덜 쓸쓸해 보인다. 그 이유는 아마 시골의 나무들이 더 '자연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안에서 '소멸'이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도시에서 보다 왠지 덜 슬픈 일처럼 여겨진다.


가을과 죽음


이하 사진 ⓒ (주)에스와이코마드


오는 19일 개봉하는 영화 <가을우체국>(감독 임왕태)은 멜로의 옷을 입었지만 소멸하는 것에 대해 줄곧 말하고 있다. 한 인간의 '사라짐'을 그려내지만 의사의 흰 가운이나 산소호흡기, 수술대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이 있다. 시골의 나무와 바람, 사계절의 변화하는 풍경은 인간의 죽음을 병동에서 일어나는 차가운 비극이 아니라 가을을 닮은 자연현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30대를 앞둔 수련(권보아 분)은 자신이 나고 자란 시골의 우체국에서 일하는 밝고 평범한 아가씨다. 조금 특별한 게 있다면 자신이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 서 있음을 알고 있단 것과 자신과 결혼하는 걸 인생목표로 삼고 10년을 기다린 준(이학주 분)이 있다는 것이다. 동네의 나무들이 담담하게 잎을 털어내는 것처럼 수련은 의연하게 자신의 끝을 받아들이고 준비해나간다. 물론 준과의 이별도 포함된다.


수련을 향한 준의 순애보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전형적인 이야기지만, 영화가 그려내는 '사라짐'에 대한 시각은 전형적이지 않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눈물을 쏟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수련 아빠(오광록 분)의 말들은 죽음을 최루성 소설이 아닌 간결하고 아름다운 시처럼 설명해낸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세 가지



영화에서 수련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행동들은 인간이 살아있음을 충만히 느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1. 쓰기

2. 달리기

3. 만들기


수련은 자신의 아빠처럼 마지막을 앞두고 일기를 쓴다. 아빠는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했다. 글을 쓰는 것, 특히 일기를 쓰는 일은 외부로 향한 시선을 나 자신으로 돌려향하게 한다. 자신을 만나게 해준다. 자기 자신과 솔직한 대화를 한 번도 나누지 못하고 인생의 끝을 맞이하는 건 슬픈 일이다.


수련은 어느 날 시골길을 오래 달리기도 한다. 육체를 움직인다는 건 살아있음을 또렷하게 느끼는 일이다. 죽으면 가장 빠르고 명백하게 사라질 것이 육체이기 때문이다. 다리를 크게 벌려 뛰고 땀을 흘리고 심호흡을 거칠고 깊게 하며 심장을 빠르게 콩닥거리게 만드는 일은 생의 감각을 고스란히 누리는 일이다.


수련은 아버지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그림을 그리고, 중국집 배달통으로 빨간 우체통을 만들고, 아버지의 미완성 발명품을 완성한다. 죽음을 앞두고 더 부지런하게 손을 움직인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는 일처럼 발명품이든 작품이든 무언가를 창조해낸다는 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이자 고귀한 행위가 아닐까.


배우들의 한 마디



<가을우체국>의 언론시사가 지난 12일 오후 롯데시네마 건대에서 있었다. 시사가 끝나고 주연배우인 권보아, 이학주, 오광록과 임왕태 감독이 기자간담회를 이어갔다. 상업영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을우체국>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보아가 답했다.


"굉장히 따뜻한 정서를 지닌 시나리오였다. 서른살에 죽음이란 단어가 생소하고 멀게 느껴졌는데, 죽음을 굉장히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수련의 모습이 매력적이어서 이 영화를 선택했다." (보아)


임왕태 감독은 가을을 배경으로 한 이유에 대해 "처음 작가님과 구상할 때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란 노래로부터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답했다. 이어 "겨울이 죽음이면 죽음을 앞둔 늦가을로 시간을 세팅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오광록은 영화 안에서 '메시지 전달자'나 마찬가지다. 특히 그의 시적인 대사들이 영화의 주된 정서를 형성한다. 오광록 배우는 "시나리오는 영화보다 훨씬 더 시적이었다"며 "외려 영화로 옮기면서 구어체로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준이 역할의 신인배우 이학주는 작품준비 과정을 묻는 질문에 "저는 수련이만 사랑하면 됐어서 어떻게 준이의 마음으로 수련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 시간을 오래 살기



영화에서 수련의 아버지는 발명과 몽상을 즐기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인물이었다. "몽상가는 현실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그저 받아들인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가을우체국>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느린 호흡으로 그렸다.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시선은 특히 인상 깊다. 아빠가 생각해내고 수련이 완성시킨 발명품인 드럼통 시계는 많은 생각을 일으키는 소재다. 요즘 사람들은 시간을 빡빡하게 나누어살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스쳐가고 '지금 이 순간'이 짧게 느껴진다. 죽음을 앞둔 수련의 아버지는 시간을 느리게 가게하기 위해 드럼통 시계를 만든 것이다. 이 시계는 일명 '자연의 시계'로 하루를 단지 이등분한다.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 자연히 드럼통 시계의 시간은 길고 느릴 수밖에 없다.    


"끝을 안다는 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하루하루가 더 소중해져."


오광록의 이 대사는 <가을우체국>이 말하고자 하는 것 자체다. 가을이 풍성한 건 익어가는 곡식덕분이기도 하지만 떨어지는 잎을 보며 시간의 끝을 상기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끝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고 풍성해진다. <가을우체국>은 너무 잔잔한 나머지 리듬감이 없는 게 단점이지만, 죽음이라는 자연현상을 가을이라는 자연현상에 빗대어 삶을 소중히, 죽음을 의연히 대하는 법을 제시한다.



기사입력 17.10.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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