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프롤로그

by 손화신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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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했다. 왼쪽으로 올라갈까, 오른쪽으로 올라갈까. 나는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려 회사로 출근한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내리면 올라가는 계단이 양 갈래로 나있고 어느 쪽으로 올라가도 벽면을 채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속 구절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오른쪽과 왼쪽의 문구가 다르다.


오른쪽 계단 벽: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왼쪽 계단 벽: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초반에는 오른쪽 계단으로 자주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그래, 내 맘 속엔 우물이 있으니까' 이렇게 속삭이며 나는, 내 삶은 지금 사막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오글거려도 조금만 더 참아줬으면 한다. 아직 왼쪽 이야기가 남았다.


요즘은 거의 왼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처음엔 오른쪽 문구만큼 와 닿지 않았는데 볼수록 나를 건드리는 느낌이다. 한때 나는 어른이란 점점 '완성'에 가까워지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어린이가 아닌 것에 열등감마저 갖고 있다. 무엇 하나를 해도 내 현재 처지를 의식하고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재미있는 제안을 받아도 그것이 내 시간을 유익하게 만들어줄지 아닐지 따져본다. 지금 이 순간 너무 즐거워도 늘 1분 후를 생각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어린이만큼 완전한 존재는 없는 것 같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정신의 세 단계 변화로 낙타, 사자, 어린이를 비유한 게 이런 의도였을 거다. 어린이가 최고다. 니체가 옳았다. 어른이 될수록 구겨져가고 제대로 살고 있단 느낌에서 점점 멀어지는 나는 어린이처럼 현재에만 머물고 싶고 자유롭고 싶고 나 자신이 되고 싶을 뿐이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 어린이였다"는 왼쪽 계단의 문구를 볼수록 그래서, 마음이 밝아진다.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나도 한때는 완벽한 존재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생긴다. 자꾸 오글거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생텍쥐페리의 저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이런 다짐을 한다.


"기억하자. 내가 어린이였다는 것을 오늘도 기억하자."


어쩌면 내가 기억해내기만 한다면 다시 어린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의 감각으로 충만했던 완성된 존재, 어린이. 모든 게 새로움이었던 어린 시절엔 작은 빗방울 하나도 '큰 사건'이었다. 그렇게 큰 사건들에 하나하나 감탄하다 보면 내 하루는 가득하게 찼다. 어른이 되어 하루가 눈 깜짝할 새 흘러버렸다고, 한 해가 벌써 다 가버렸다고 툴툴대는 건 내가 매 순간 빛나는 것들을 허술하게 흘려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데, 나 이제 어른 안 할 거다.


유치하고, 세상 무서운 거 모르고, 내 멋대로 사는 어린이가 될 거다. 인정받지 못해도, 돈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마음 가는 대로 살 거다. 하루하루씩만 살 거다. 세상이 내게 강요하는 이상한 것들일랑 상한 우유 뱉듯이 뱉어버릴 거다. 지금 눈물 흘리고 있어도 누가 맛있는 거 주면 10초 후엔 세상 행복하게 웃어버릴 테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움직임이며,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나의 형제여, 신성한 긍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잃어버리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는 것이다."


- 니체(Nietzsch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위의 글은 <오마이뉴스>에 발행한 저의 기사글을 토대로 고쳐쓰기 한 것입니다. 매거진의 방향성을 드러내줄 프롤로그로써 적합하여 사용하게 됐으며, 필요하다면 추후 내용이 통하는 다른 문장들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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