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주체

by 손화신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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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2주째 판매지수 100위 안에 머무는 스테디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 아직 인쇄도 안 된 책이 예약판매로 미친 듯이 팔려나가는 '믿고 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나는 월세 43만 원을 매달 12일에 입금할 필요가 없는 집주인이 되고 싶다. 나는 시트로엥 C4 피카소의 차주가 되고 싶다. 나는 사려 깊게 타이밍을 살펴 연차기안을 쓸 필요가 없는 자유노동자가 되고 싶다. 한 번도 아시아를 벗어나 본 적 없는 나지만 부모님에게 파리 에펠탑을 구경시켜주고 아파트도 사주는 효녀가 되고 싶다. 이 모든 게 못 되어도 지금은 아무 상관 없지만 굳이 말하라면 이 정도가 되겠다.


"인간은 항상 두 가지를 열망한다. 가질 수 없는 것과 갖고 싶은 것."


내가 최고 좋아하는 작가 안톤 체호프가 한 말이다. 언젠가 저 문장을 오래도록 노려본 적이 있다. 뭔 말인지 알겠는데 뭔 말인지 모를 것 같은 기분. 일단, 갖고 싶은 걸 열망하는 건 당연하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은 심리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푸는 법 없는 체호프가,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인간은 가질 수 '있는' 것은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것이 체호프가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었을까. 마치 같은 말처럼 들리는 '가질 수 없는 것=갖고 싶은 것'을 굳이 조사를 써서 분리시킨 것도 그의 위트 아니었을지. 나는 자연스럽게 '가질 수 없는 것'의 반대말인 '가질 수 있는 것'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어른은 가질 수 있는 것보단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한다. 몇 년 전에 가방을 사러 초특가 아울렛에 간 적이 있는데 나는 두 개의 숄더백을 손에 쥐고서 뭘 살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어느 때보다 숙고했고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패턴무늬 가방 말고 무늬 없는 브라운 백을 사자. 손에 있던 패턴무늬 백을 내려놓았다. 그때 갑자기 많은 인파 사이에서 한 여자가 불쑥 나타나 들뜬 어조로 내게 말했다.


"이거 안 사실 거죠?"


이 여자, 나를 지켜본 게 틀림없다. 여자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내 입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 거예요."


내 어조가 확신에 차 있어서 나도 놀랐다. 딱 하나 남은 패턴무늬 백을 다시 집어 들고 계산대로 직진하여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성취감을 느꼈다. 하, 나란 인간... 매장을 나오면서 나란 인간 참 웃긴 인간이라며 자조했다.


가방 일화는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고등학생 때 나는 여행작가가 되고 싶었고, 25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으며, 그러다 기자가 되고 싶었고, 기자가 되고 나니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무엇인가가 계속 '되고' 싶은 존재였다. 그것이 될 수 없을 때는 더 되고 싶었다. 바라는 존재가 결국 되지 못했을 때, 내 인생이 너무 불행하고 우울하게만 여겨졌는데 그런 생각은 나를 공황장애라는 소굴로 끌고 들어가기까지 했다. 내 20대 후반은 그랬다.


조금 빨리 어린이로 돌아갔다면, 나는 그렇게 불행하지 않았을 거다. 어린이는 안 그러니까. 어린이는 '가질 수 있는 것'을 매일 가지고 그것에 기뻐한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다. 미래에 무언가가 되길 희망하기보다는 오늘 무언가가 되는 사람이다. 물론 갖고 싶은 걸 못 가질 때 그걸 더욱 열망하는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뽀로로 인형을 엄마가 안 사줄 거라고 선포했을 때, 그때부터 뽀로로 인형은 5살 인생의 모든 목적이 되고 대성통곡은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가 우울이나 불안까지 겪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간순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과 될 수 있는 것을 누리는 주체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버스에 올라타면 어린이는 승객이 '된다'. 빵집에 들어가면 어린이는 빵 고르는 사람이 '된다'. 미용실에 가면 어린이는 머리카락 잘리는 사람이 '된다'. 놀이터에 가면 미끄럼틀 타는 사람이 '되고', 동물원에 가면 코끼리와 인사 나누는 사람이 '된다'.


어린이는 매 순간 주체다. 그들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는 말은 어른의 헛소리일지도 모른다. 어른은 미래에 무엇이 되길 꿈꾸지만 어린이는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된다. 의사가 되고 싶고, 배우가 되고 싶고, CEO가 되고 싶은데 아직 그것들이 안 돼서 되어야만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들은 충만한 하루를 보낸다. 여의도에서 신당까지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탄 어른들 속에서 어린이는 '승객'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뿐이다. 손잡이를 잡아보려고 애쓰고 벨을 먼저 누르려고 앞의 꼬마와 경쟁하고 버스의 덜컹거림에 꺄륵 비명을 지르고 교통카드 찍히는 소리를 따라하기도 하며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가게와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 하루 난 스테디셀러 작가가 되지 못했고 자가소유자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동네 스타벅스의 손님이 되었고 커피 마시는 사람이 되었으며 캐럴 듣는 사람이 되었고 글쓰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바란 것들이 다 이루어진 오늘이 특별하지 않은 날이라고, 평범한 날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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