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하루

by 손화신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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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수 없는 인간은 영원한 소멸로부터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저마다의 구원을 마련한다. 누구는 절대적 존재를 믿고, 누구는 자기 유전자를 지닌 2세를 낳고, 어떤 사람은 다음 세대에도 전해질 걸작을 그린다. 그리고 특별히 축복받은 이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하는 연인의 단 한 번의 눈길에서 구원받기도 한다. 지금 죽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 죽음이 극복되는 듯한 기분. 자기 생의 구원들은 이토록 갖가지다.


나의 구원은 세 가지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평생 기억되는 것, 오래 남을 작품을 써서 그것을 읽는 사람들 안에서 계속 사는 것, 그리고 하루.


하루는 나의 구원이다. 살아간다는 게 꽉 막힌 관 속에 누워 누군가에게 발견되길 기도하며 버티는 일처럼 느껴지던 때, 그때 찾아낸 아니, 내게 운명처럼 와준 구원이 '하루'였다. 하루는 나를 죽지 않게 했고 앞으로도 죽지 않게 해 줄 영원의 열쇠다.


하루씩만 살기.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삶의 방식인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삶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을 살지도 말고, 한 달을 살지도 말고, 한 해를 살지도 말고, 20대를 살지도 말고, 노년을 살지도 말고 오직 하루만 사는 것. 이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다. "내일은 없다, 오늘만 산다"라는 말은 내가 사는 나라의 칙령이고 삶이라는 마법세계의 주술문이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는 마태복음의 구절은 묵직한 산소통 같다. 바닷속에서 숨 한 조각이 유일한 소원일 때, 이 산소통은 내게 숨을 주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해줄 테니 나는 오늘 걱정만 하면 된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완전히 새로운 하루가 내 앞에 배달되어 있고 그것을 살아내면 다음 날 또 완전 새 것의 삶이 내게 주어진다. 삶은 이어지는 한 덩이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샘솟는 화수분이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도 이어질 거란 확신에 한때 나는 불행했지만 지금은 '오늘의 불행'만 소유한 사람이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오늘의 고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불행한 사람'이지 내일의 불행까지 가불 받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홀가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린이들은 구원받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구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오늘만 산다. 하루씩만 사는 게 어린이의 가장 어린이다움이다. 그들은 연말에 특별히 바쁘지 않다는 게 그 증거다. 한 달 혹은 1년이라는 '망상'을 갖고 있지 않은 어린이들은 한 해라는 개념이 없으니 한 해를 정리할 필요도 없다. 어른만이 올 한 해를 돌아보며 계획한 바를 얼마나 이뤘는지 점검하고 내년을 구상한다. 6살 꼬마에게 "2018년은 너에게 어떤 해였니?"라고 묻지 않는다. 이것이 어딘가 이상한 질문이란 걸 직관으로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대신 아이에겐 이렇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땠니?"


어른들의 하루는 아침과 점심과 저녁과 밤으로 이루어져 있고 24시간이지만, 어린이들의 하루는 좀 다르다. 어린이는 시침이 아니라 분침 위에서 살아간다. 2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120개의 1분을 산다. 그들에겐 매 순간이 매 순간일 뿐이다. 매 순간이 다음 순간을 위한 발판이 되는 일도, 매 순간이 이전 순간이 낳은 결과가 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현존하는 자이고, 그들은 강할 수 있다.


"나는 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치들과는 달라요. … 나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나갈 뿐이오."

- 프랭크 시나트라


'My Way'를 부른 가수로 잘 알려진 프랭크 시나트라가 한 말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긴 호흡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들만큼은 그리고 저 한 마디만큼은 깊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저 한 마디 말로 유추할 수 있는 건 그가 어린이 같은 사람이었을 거란 사실이다. 그날 먹을 생크림 케이크를 내일을 위해 아껴두는 타입의 사람은 절대 아니었을 거다.


아이들은 오늘 돌릴 팽이를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그건 미룰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루'는 오늘의 것이지 내일의 것이 아니니까. 오늘 내 것이어야 할 행복과 즐거움을 언젠가의 날들 속에 저장해두는 건 아이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어린이를 닮았다.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봤는데 매번 이해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겼을 때 굳이 잘 달리던 버스를 멈추게 하고 "내려달라"고 기사님에게 떼를 쓴 다음 거리를 전속력으로 내달려 그 사람 앞에 도착한다. 그런 다음 고백을 하든 뭘 하든 하고 싶은 말을 기필코 하고야 마는 것이다. 내일 만나서 해도 될 텐데 왜 기를 쓰고 오늘 말하려고 하는 걸까,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일은 없기 때문이다.


"완성된 인생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모든 사람은 언제까지나 미완성이야."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중


하루키의 완성된 인생은 없다는 생각에 백번이고 동의하며, 여기에 딱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완성된 '인생'은 없지만, '하루'는 언제나 완성이라고. 그래서 하루는 구원이라고.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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