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노란색인데 우리동네는 품절이란다. 내일 광화문에 나갈 때 그곳에서 노란색을 꼭 찾고야 말겠다. 스타벅스 2019년 다이어리 이야기다. 우리동네에선 노란색 다이어리가 5종 중에 가장 인기있나 보다.
음, 그런데 난 다이어리를 안 쓴다. 집에 노트도 많다. 글 쓰느라 요즘 부쩍 카페에 자주 갔더니 나도 모르는 새 e프리퀀시란 게 쌓여있었다. 그걸 17개 모으면 다이어리를 준다는데 앱에 들어가봤더니 15개가 모여있었다. 이렇게 되면 안 받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운명 이상의 숙명 같은 것. 내 인생에 갑자기 끼어든 버킷리스트다.
어쨌든 나는 그 다이어리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후부터 그것의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고 내부구성도 어쩐지 딱 내 스타일이었다. 나는 왜 쓸지 안 쓸지 모르는 스타벅스 다이어리에 사로잡혔을까. 그것에 왜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걸까. 공짜니까? 단지 이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그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이 심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란 걸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매년 연말이면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겟'하기 위해 없던 약속을 잡아 스타벅스로 가고, e프리퀀시를 자신에게 '몰빵'해달라며 애원하는 친구들을 봐왔던 거다.
어른 세계의 '가치'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 형편에, 자신의 생활 패턴에 딱 맞는 차는 경차인데도 경차는 절대 안 타려는 강경함을 지닌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을 보고 "그에겐 실용성이란 가치보다 안락함이나 멋이라는 가치가 더 소중하겠지"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단지 '허세'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가치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내게 가치를 주는 것이 무언지 잘 알지 못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걸 곧 자신의 가치로 여기는 삶. 빨간색, 남색, 하얀색 다이어리가 동네 스타벅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노란색 다이어리를 가져야겠다며 나서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들은 건축, 정원 일이나 가사, 재봉이나 목공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에 끌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쓰레기로 발생하는 것 중에서 아이들은 사물들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에게, 자신들에게만 돌리고 있는 얼굴을 인식한다. 그것들을 이용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 그냥 놀다가 만든 것을 통해 실로 다양한 종류의 소재 상호 간에 새로운, 비약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런 식으로 그들만의 사물 세계, 커다란 사물 세계 속의 작은 사물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중 '건설현장'
발터 벤야민은 어린이의 특징을 포착했다. 길에서 쓰레기를 주워오는 어린이를 본 적 있을 것이다. 혹은 당신이 그런 어린이였을 것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어린이는 자신만의 가치기준으로 사물을 모으고 그것들을 자신만의 규칙으로 연결한다. 그렇게 하여 '유에서 유'를 만들어낸다. 어른들이 부러워하는 어린이의 창의성이란 이렇듯 창조적 연결, 독창적인 편집에서 비롯된다.
나는 어떨까? 세상의 사물들을 내 가치로써, 내 식으로 애정하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을 갖고 방안을 둘러봤을 때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가 눈에 띄었다. 여행지에서 주워온 돌멩이들이다. 제주도, 경주, 속초, 석모도 등지에서 데려온 작은 돌들과 서해바닷가를 걷다가 주워온 소라와 조개껍데기, 긴 시간 파도에 깎여 동그란 초록 보석이 된 유리병 조각들이 상자에 모여있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나만의 가치 운운할 자격, 내겐 그래도 조금은 있는 거 아니냐며.
SNS를 기웃거리다보면 '예쁜 쓰레기'라는 말을 종종 본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되게 끌리는 말이다. 책상 서랍 안에 예쁜 쓰레기 하나쯤 없는 사람이라면, 어쩐지 좀 그렇다.
어린이가 길거리의 쓰레기에 마음을 빼앗길 때(물론 그들에게는 쓰레기가 아니다) 길에 누운 그 물건은 어린이를 애타게 부른다. 어린이는 그 목소리에 응답할 뿐이다.
"친구야~ 나를 데려가~ 나를 어서 데려가줘~ 난 너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거야. 나를 네 방의 후드라이언 인형 옆으로 데려다주겠니? 나랑 같이 놀자~"
어린이는 이런 식으로 세상의 존재들을 사랑한다. 남들에게는 버려 마땅한 물건일지라도, 아이에게는 잘 때까지 놓을 수 없는 제일가는 보물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어른보다 쉽게 행복해지는 비밀이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태도. 어린왕자가 자신의 장미 한 송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말이다. 나만의 것이 있다는 것. 어른들도 그런 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수집하는 수집광들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거다. 그들의 희열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누가 멋지다고 말해주든 말든 혼자 가만히 모은 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고 느낀다. 세상은 '예쁜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들, 예를 들면 장식장을 가득 채운 피규어들, 세계의 맥주병들, 독특한 디자인의 라이터들, 각기 다른 질감의 나무조각들... 이런 것들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배우 변요한이 연기한 김희성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저는 이렇게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답니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같은 것들을."
얼마 전에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미미 인형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조카선물: 뉴 리틀미미' 중 '빨강망토 미미'였다. 모자가 달린 보드라운 벨벳소재의 빨강 망토를 입고 한 손에는 피크닉 바구니를 든 작은 소녀였다. 피크닉 바구니에는 바게트 하나와 초코머핀이 깨알같은 크기로 들어있었고, 살짝 커보이는 갈색 장화가 가장 귀여웠다. 이런 선물을 받아본 게 그러니까... 대략 8살 이후로 처음이다. 마음에 들었다. 쓸모없으면서 귀여워서, 내가 한때 어린이였다는 걸 기억하게 해줘서.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