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자유

by 손화신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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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는 행복이 그렇듯 제각각이다. 누구에게 커피는 행복이지만 누구에겐 쓴 약인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 실수라고 여겨지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실수가 아니다.


'조심하지 아니하여 잘못함. 또는 그런 행위.' 실수의 사전적 의미다. 그런데 '잘못함'이란 단어는 어쩌면 잘못 쓰였을지도 모른다. 방바닥에 물을 쏟았을 때 보통 "실수했다"고 말하지만 물을 쏟은 게 잘못한 일일까 생각해보면 막상 그렇지도 않다. 혼잣말로 욕 한 번 하고 그냥 닦아버리는 일이니까. 우리는 물을 쏟지 않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니까.


어린이는 실수를 모르는 자유의 전령이다. 그들은 모래성을 쌓다가 무너지면 까르르 웃어버린다. 모래성의 주인은 자신이니까 무너졌다고 해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완성된 모래성을 선생님에게 숙제로 제출하고 점수를 받아야 하는 '학생' 이전의 어린이를 상상해보라.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모래성을 무너뜨리고 또 쌓으며 즐거워한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면서 점수 매겨지고 회사에 들어가서 순간순간 평가받으며 살다 보면 모래성을 쌓다가 무너졌을 때 웃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 우리가 물을 쏟고 나서 습관처럼 실수했다고 말하는 건 물을 쏟으면 엄마한테 혼났기 때문에 그것이 학습된 탓일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주인이 아닌 채 남의 시선 안에서 살아가는 게 익숙해져버린 사람들. 실수가 아닐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런 어른들에겐 실수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고 그렇게 매일 자유에서 멀어진다. 내가 그런 인간이다. 좀 더 어린이 같이 산다면 나의 실수들은 '잘못'이 아니라 그냥 '웃긴 일'이 돼버릴 텐데. 친구에게 '내가 웃긴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 하고 무용담 늘어놓듯 내 실수들을 말할 텐데.


얼마 전에 목욕탕에 가려고 나서는데 문득 지난번에 본 요금표가 생각났다. 내 기억으로는 밤 9시 이전과 이후의 요금표가 달랐다. 분명 9시 이후에 입장하면 2000원이 더 저렴했다.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렸다가 출발하면서 너무 쉽게 2000원을 번 나의 영리함에 으쓱했다. 도착해서 기쁜 마음으로 계산하려는데 직원 아주머니가 안쓰럽다는 말투로 말씀하셨다. 아이고, 몇 분만 빨리 오시지, 9시 이후에는 할증이 붙어서 1000원 더 주셔야 돼. 이럴 때 체감되는 억울함은 3000원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9000원을 내고 수건을 챙기며 나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일부러 기다렸다가 왔다고. 아주머니는 웃겨 죽겠다고 웃으셨고 나도 같이 막 따라 웃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말하니까 엄마도 막 웃었다. 실수를 해야 웃을 일이 생기구나, 그때 생각했다.


내가 한 게 실수라고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은 뼛속까지 자유인이다. 실수에 한바탕 웃는다는 건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내가 나에게 실수하는데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잘못했다고 반성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다. 실수 없이 완벽하려는 강박도 필요 없다. 사실, 알면서도 나는 이게 잘 안 된다. 물건을 잃어버린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매 순간 내가 얼마나 긴장한 채 사는지 말해주는 기호가 아닐까 싶다.


얼마 전에 러시아 영화를 하나 봤는데 남자와 여자가 그들의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커피를 사들고 가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테이크아웃 잔의 그런 커피가 아니다. 커피가 담긴 도자기 찻잔을 그대로 손에 들고서 버스를 타더니 심지어 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 상황이었는데, 물론 버스는 흔들렸고 커피는 반쯤 쏟아졌다. 두 사람은 커피가 쏟아진 게 재미있는 일이라도 되는 듯 킥킥킥 웃었다. 모래성이 무너졌을 때 깔깔 웃던 어린이들 같았다. 커피를 안 쏟고 전달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이 즐거운 사람들. 스크린을 통해서였지만 그들이 웃는 얼굴을 보니까 나의 긴장이 모두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실수 안하기'에 목숨 거는 목적지향적인 인간이 돼 버린 걸까, 언제부터 커피가 쏟아지는 그 특별하고 웃긴 상황에 인상을 쓰는 인간이 된 걸까, 생각했다.


실수를 안하려고 한 게 다 실수였다. 노예가 실수하지 주인은 실수하지 않는다. 어른이 실수하지 어린이는 실수하지 않는다.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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