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사랑

by 손화신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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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사촌동생이 집안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더니 자기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줘버린다. 귀찮은 종이 쪼가리 좀 대신 버려 달라는 듯이 날름 줘버린다.


'미쳤구나'


내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혼잣말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넘어가려던 즈음이었을 거다. 시퍼런 지폐들을 엄마 주머니에 구겨넣고(학습된 행동일 수도 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서는 사촌동생의 얼굴이 참 멍청해 보이던 그때, 나는 어린이의 세계와 작별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취업을 하고 (자본주의)사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모든 게 돈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세상에 완전히 적응했다. 그건 어른의 표식과도 같았다. 돈의 가치를 안다는 것, 돈의 가치에 얽매인다는 것, 돈의 가치로 타인을 가늠한다는 것... 돈이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불행할 가능성이 현저히 커진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배운다는 것. 타인과 세상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한하게 확장되는 대신 그때부터 자본주의라는 틀에 갇혀버렸다.


인정하기 아프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나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돈이라는 가치에 어느 정도 빼앗기며 산다. 그래서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한다. 타인을 사랑할 때 그에게 나의 모든 시간을 주고 재능을 주고 에너지를 주지만, 시간과 재능과 에너지 그 모든 게 돈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주저 없이 줘버리지 못한다. 신생아 모자뜨기 캠페인에 동참해야지 하다가도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돈 되는 일'을 해내느라 모자뜨기는 항상 뒤로 밀린다. 매일이 사실 이런 식이다.


용돈을 받아서 그걸 종이비행기 접기에 쓰는 어린이만이 자본주의에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사랑을 간직한 인간이다. 어린이는 돈이 안 되는 일들만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일만 한다. 끌리는 모든 사람과 사건과 물건에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어린이처럼 한계 없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돈 따위는 찢어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하는 활동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어릴 때부터 막연히 꿈꿨던 봉사하는 삶이란 게 어느 날 돌아보니, 나와 상관없는 먼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졌을 때다. '돈 안 되는 일'을 하나쯤 해야 인간으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겠구나, 그때 자각했다. 재능기부라도 해야겠다며 주변을 탐색했다. 그러니까 고백하자면, 내가 재능기부를 하려는 건 '좋은 의도'에 동참하겠다는 의도에 앞서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상받은 내 사랑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다. 나는 돈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돈은 개나 줘버려도 좋으니 오직 순수한 의도로만 무언가를 하는 인간이다, 그걸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순수한 마음을 전할 때 오히려 돈은 방해꾼이다. "내게 돈을 주시면 이 일을 안 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좋은 일에 동참하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사례를 받으면 그 의도는 손상입을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본주의 공식에 반하는 '반항'을 할 때 두 발의 족쇄가 풀려나가는 느낌이다. 돈과 상관없이 남을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은 어린이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한 걸음이다. 타인을 위해 계산 없이 나를 쓸 때 어린이처럼 순수한 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건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얼마 전 주윤발의 8100 억 전재산 기부 소식을 듣고 내가 품고 사는 가치들을 한 번 정비했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인터뷰에서 그가 말했다. "어차피 그 돈은 내가 잠깐 갖고 있었던 거다. 죽고 나면 소용없는 돈이다. 그 돈이 의미 있는 단체 혹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였으면 한다"고. 트렌치코트도, 성냥개비도, 선글라스도 이것보다 멋있진 않았다. 진짜 어른이구나 싶었던 그가 환하게 웃었을 때 왠지 그 얼굴이 어린이처럼 보였다.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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