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로 살 수 없을 때, 미치게 쓰고 싶었다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01. 내가 나로 살 수 없을 때, 미치게 쓰고 싶었다
#3. 잃어버린 맹구를 찾아서
나는 맹구였다.
고등학생 때 내 별명은 맹구였다. 이 별명은 지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인데, 쏭소라는 친구 딱 한 명이 나를 아직도 맹구라고 부르고 있어서 간신히 멸종은 면한 상태다. 내가 왜 맹구냐고 친구들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코미디 코너 ‘봉숭아 학당’에서 맹구 역을 맡았던 개그맨 이창훈과 내 얼굴이 닮아서 맹구라고 부르는 거라고 친절히 설명해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두 번째 이유였지 싶다. 내가 맹구인 진짜 이유는 하루에 38회쯤 날리던 내 실없는 개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농담 없인 하루가 돌아가지 않던, 그런 눈부신 날들이 있었다. 지금은 아재개그라는 엄연한 명칭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나의 농담들은 ‘맹구 같은’ 말들로 불렸고, 그래서 나는 맹구였다.
맹구는 이제 없다.
내 안에서 그 별명을 지운 건 2012년이었다. 그때 나는 인턴기자로 작은 회사에서 첫 발을 디뎠는데 그곳은 군대보다 더 군대 같은 조직이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에이 선배, 삐치신 거 아니죠?”라고 말했다가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쌍욕을 한 바가지 들었고 이런 말도 들었다.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때부터 제정신에 대한 강박이 시작됐다.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제정신 아닌 말이면 어떡하지, 버릇없는 말이면 어떡하지 하고 자기검열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사건 이후 내 입술은 ‘삐치다’란 단어를 발음한 적이 없었고 농담 비슷한 말들,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굳이 했다가 오해를 살 수 있는 개그 따위는 자제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받아칠 아재개그들이 마음속에서 둥둥 떠다니지만 입밖으로 끄집어내지는 않는다. 그 후로 회사를 몇 번 옮겼지만 이런 습관은 여전히 내 주변을 서성인다. 개그는 내면의 언어로만 남겨둘 뿐. 한번은 회사 동료에게 ‘나 농담 되게 잘해’라고 고백했는데 동료는 ‘너 지금 농담하니’ 하고 진지하게 되물었다. 억울했다.
얼떨결에 내 것이 된 삼사일언 습관은 절반은 플러스, 절반은 마이너스로 내 삶에 작용됐다. 아직도 자기검열을 한다는 건 순수하게 내 잘못이란 걸 안다.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나서 내 중심이 흔들렸을 때 그걸 바로잡고 회복하고 나다움을 지켜내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니까. 나의 인생사전에 금지어 같은 건 없어야 했고, 맹구처럼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원래의 나답게 살아야 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란 게 있다면, 친구들을 만날 땐 언제나 푼수처럼 풀어진다는 것이다.
성격은 이런 식으로 변하는 거더라. 상처 받고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가면 하나가 추가되고 그 가면이 어느새 진짜 나의 얼굴로 녹아버린다. 이 가면은 회사에서만 쓰는 거니까 나중에 벗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근무 시간이 하루 9시간으로 매우 길다는 건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착오다. 가면을 오래 쓰고 있으니 그게 내가 됐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이 더러운 기분. 인격이란 의미로 통용되는 ‘페르소나(persona)’란 단어의 어원이 가면이라고 하니 이거 뭔가 묘하다.
어디서든 그 공간의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주(었다고 믿)던 그때의 나는 이제 있는 듯 없는 듯 최대한 무난하고자 애쓰는 캐릭터로 바뀌었다. 이것을 자각했을 때,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의지가 피어났을 때 나의 글쓰기는 연료를 얻은 듯 쿵쾅쿵쾅 움직이기 시작했다. 맹구 같던 내가 그리워졌을 때, 원래의 나를 되찾고 싶다는 욕구가 요동쳤을 때 그즈음 글쓰기도 활력을 얻었던 것이다.
쓸수록 나는 내가 되어갔다.
제법 분명한 감각이었다. 처음부터 의도하진 않았지만 글을 쓰면서 잃어버린 ‘나다움’을 조금씩 찾아갔던 것 같다. 손화신다워지는 느낌은 그 자체가 힘이었고 그 힘이 나를 바로 세웠다. <나를 지키는 말 88>의 원래 제목, 그러니까 내가 지었던 가제는 <나답게 하는 말>이었는데, 당시의 글쓰기가 내게 어떤 의미의 활동이었는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과정이었는지를 이 가제가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