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나다워진다는 것'의 정의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2. 나다워진다는 것의 정의
나에게 글쓰기란 내가 나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나다워진다는 것'의 정의는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글쓰기는 어떻게 내가 나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지 말하기 전에, 먼저 '나다움'이란 게 무엇인지에 관한 '나의 정의'를 이야기한다.
#1.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고 죽을 때까지 다 알진 못하겠지만 20살 때보다는 지금 더 많이 알고 있다. 글을 쓰면서 나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갔다. 아마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 정도가 덜했지 싶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그냥 쉬운 게 좋아/ 하긴 그래도 여전히 코린 음악은 좋더라/ 핫핑크보다 진한 보라색을 더 좋아해/ 또 뭐더라 단추 있는 파자마, 립스틱, 좀 짓궂은 장난들” (아이유, ‘팔레트’ 가사 중)
나다워진다는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많이 알아간다는 거다. 25살 때 아이유는 자신의 일기장을 보고 쓴 ‘팔레트’에서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이라고 말한다. 그 나잇대의 사람들은 더 나다운 게 무엇인지 찾는 과정을 다른 나잇대에 비해 더 부지런히 거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일처럼 누구에게나 똑같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자기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으면 모른 채로 그냥 사는 거다. “근데 그게 나빠?” 하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상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미치게 궁금하다. 미치게 알고 싶다. 미치게 모르겠다."
입시 교육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예전부터 무언가를 더 많이 '아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이젠 그게 외부가 아니었으면 한다. 고등학교 시절, 지구본을 무릎 앞에 놓아두고 빙그르르 굴려가며 그 많은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외웠던 관심으로 이제는 나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나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뭐든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다 나오는 마당에, 스마트폰이 뇌의 외장하드 역할을 하는 마당에 굳이 외부적 지식을 기억하느라 끙끙대고 싶진 않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건 그럼 어떤 원리일까.
일단 ‘쓰기’라는 활동은 자신과의 거리두기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건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인데, 모든 ‘바라보기’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그림이 눈앞에 딱 붙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다. 나는 이 원리를 설명할 때 꼭 하루키를 대동하고 나선다. 하루키의 ‘굴튀김 이론’은 쓰기의 본질을 한 마디로 풀어버리는 '한 방'이다. 어떤 독자가 하루키에게 자기소개서 쓰기가 너무 힘들다고 고민상담을 해왔는데 하루키는 이렇게 제안했다. 자신에 관해 쓰는 것 대신 그럼 굴튀김에 관해 써보는 건 어떠냐고. 웬 굴튀김?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까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중략)... 물론 굴튀김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민스 커틀릿이든 새우 크로켓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루키, <잡문집> 중)
나는 이 굴튀김 이론을 접한 후로는 ‘무엇에’ 관해 쓸 것인지 크게 고민하지 않게 됐다. 무엇을 쓰든 그 길의 끝엔 내 안의 내가 기다리고 서있고, 내 목적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니까. 굴튀김에 관해 쓸지, 민스 커틀릿에 관해 쓸지, 지구본에 관해 쓸지 고민하는 건 ‘오늘은 어떤 옷을 입고 걸을까?’ 하는 고민과 비슷하다. 입은 옷에 따라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도 다르고 그날의 내 컨디션도 달라지겠지만 그건 그냥 옷일 뿐이다. 이 출발점에 내가 서있는 이유는 ‘걷기’ 위해서다. 나라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해도 괜찮다. 걸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나다워지는 거니까. 집중해야 할 건 걷기 그 자체고, 쓰기 그 자체다.
어떤 글쓰기든 결국은 ‘나에 대한 탐구활동’으로 귀결됐다. 심지어 기사를 쓸 때도 그렇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거리두기' 했을 때 내가 더 제대로 보였다. 가구 만드는 법에 관해 쓰는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건 그러니까 어떤 단어로 그 가구 작업을 설명하고 묘사하는지 '쓰는 나'를 관찰하는 과정이다. 그때,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어떤지, 나란 인간이 어떤 인간이지 드러난다. 가구는 거들 뿐.
자신에게 함몰되는 그 아마추어 같은 짓은 글을 씀으로써 예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