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나다워진다는 것'의 정의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2. 나다워진다는 것의 정의
#2. 자기를 한 번 털어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닌 것 같다. 기쁜 걸 '말하면' 반으로 줄어들 때가 있다. 나는 정말 기쁠 때, 그 기쁨을 훼손하고 싶지 않을 때, 그것을 크게 키우고 싶을 때 이 규칙을 지킨다.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 것.
입 밖으로 꺼내놓은 것들은 빛바랜 사진이 되곤 한다. 평소 호감을 갖던 사람이 내게 던진 눈인사 한 번에 난 지금 너무 행복한데, 그래서 그 벅찬 기분을 친구에게 털어놨는데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눈이 마주쳤으니까 예의상 인사한 거 아냐? 큭큭". 반대로 친구가 아주 열띤 반응을 보여줬다고 해도 무언가를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는 자체로 마음속의 감정이 한 풀 꺾이는 걸 종종 느낀다.
이건 무슨 심보인 걸까. 혹시 이런 원리가 아닐까.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중
불행을 입 밖으로 이야기하면 더 이상 불행이 아닌 게 된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그 불행은 빛을 잃는 것이다. 얼마 전 동료와 같이 점심을 먹는데 스페인 국경에서 갱단에게 납치돼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해줬다. 칼에 상처까지 입었으니 웃으면서 들을 일이 아니었던 거다. 완전히 몰입되어 다 듣고 나서 내가 그랬다. 트라우마를 그래도 잘 극복했나보네. 그 동료가 말했다.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다녀. 말할 때마다 공포나 트라우마가 옅어지는 것 같거든. 이성복 시인의 말이 이런 것이었나보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성립되는 것 아닐까. '이야기된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행이 설 자리가 생긴다.' 기쁘고 벅찬 일이 있을 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면 부정이라도 탈까봐 조심조심하며 혼자 꼭 간직하려는 마음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의 경우 내 소중한 행복을 이야기할 때,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에 마음 한쪽에선 불행이나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느낌을 받은 적 있다.
글도 비슷하지 않을까. 많은 소설들이 대놓고 희망적이고 경건하고 바르고 건설적인 대신, 느와르 영화처럼 씁쓸하고 어둡고 절망적이다. 우리가 절망에 관해 쓰는 이유는 절망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절망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한 번 털어내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는 것도 비슷한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가수 한영애의 인터뷰를 읽다가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기자가 "노래란 뭘까요"라고 묻자 그녀가 답했다.
"정화제? 마음의 주름진 것을 다 펴잖아요. 소리를 낸다는 건 자기를 한 번 털어내는 거예요. 저는 많은 분들에게 노래하는 걸 권해요." (중앙일보, 2013. 2. 15)
털어내는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행복을 털어낼 리 없지 않은가.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슬픔을 가사와 멜로디에 실어 입 밖으로 토함으로써 홀가분해지고 덜어낸 그 자리에 슬픔 아닌 것을 들여놓는 거다.
글쓰기도 쓰는 사람을 홀가분하게 만든다. 앞에서 말한 '거리두기'와 비슷한 맥락이다. 자신을 제삼자 보듯 객관화하여 보는 것처럼 내 안의 감정 또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내 안에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감정을 떼어내는 작업이다. 털어내기란 곧 떼어내기다. 떼어내서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면 홀가분한 내가 남는다. 이것은 글쓰기가 우리에게 해방구를 열어주는 방식이다.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아 힘든 감정, 마음에 엉켜붙어 있는 걸 글자로써 떼어내면 '이야기된 불행'이 되고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그러니 글쓰기란 곧 ‘작별활동’이다.
밴드 혁오의 정규앨범인 <23>의 발매 음악감상회를 취재한 적 있다. 오혁은 그 앨범을 작업할 때 고민한 지점에 관해 말했다.
“새로운 메시지를 가지고 작업하는 게 맞을까, 기존 정서를 마무리하고 넘어가는 게 맞을까 고민했다.” (오혁)
고민 끝에 오혁은 기존 정서를 마무리하는 걸 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새 앨범에도 이전 앨범과 이어지는 공허와 염세, 불안이 깃든 노래들을 채웠다. 그가 한 말, 기존 정서를 마무리하고 넘어간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 말은 노래라는 게 마음속에 정돈되지 않은 채 흐트러진 무언가를 버리든 책꽂이에 꽂아놓든 정리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주제로 작업한다고 마음에 남은 게 저절로 잊히는 건 아니다.
몇 달 전에 영화 두 편을 봤다. <서치>와 <퍼스트맨>이다. 두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그려지는데 <서치>는 아내의 죽음, <퍼스트맨>은 어린 딸의 죽음이다. 아내의 죽음을 겪은 데이빗(존 조)과 딸의 죽음을 겪은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아내와 딸에 대해서 스스로도, 남은 가족에게도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 것.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딸의 그리움이 커질까봐, 죽은 딸을 잃은 아내의 마음이 다시 슬픔으로 찰까봐 아예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서로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러다가 두 주인공이 어떤 큰 사건을 겪으면서 변화한 후 남은 가족에게 엄마 이야기를, 딸 이야기를 비로소 꺼내놓게 되고 비로소 관계가 회복됐다. 이걸 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거나 쓰는 것은 그것이 가진 슬픔을 더 강화하는 일이라기 보단 ‘잘 떠나보내는’ 일이란 것을 말이다. 잊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잘 떠나보낸다는 건 더 좋은 형태로써 잘 간직한다는 말일 테다. 그러니 인형에게 말해도 좋고, 일기에 써도 좋다.
한 정신과 의사는 '홀가분'이란 감정이 인간에게 있어 질적으로 최상위 정신 상태라고 말했다. 홀가분한 인간은 자유롭고 강하다. 그리고 더 '나답다'.
나의 불안과 고통을 털어놓을 친구는 몇 없지만 서랍 안에 노트와 펜은 많다. 그것으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