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나의 색깔 찾기'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3. 어떻게 쓸 것인가: 나의 색깔 찾기
#1. 딱 봐도 니 글
피카소, 고흐, 칸딘스키, 모딜리아니, 뭉크, 마크 로스코, 모네, 샤갈...
나는 이 화가들을 화풍으로 기억한다. 스타일로 기억되는 사람들은 다 멋있다. 화가마다 화풍이 다르다는 게, 확연하게 남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멋있고 부럽다. 피카소 그림 중에 내가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그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고 할지라도 피카소의 다른 그림들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것이 피카소 그림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본 적 있고, '마리 테레즈 발테르의 초상'을 본 적 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쯤 피카소 그림을 보고 "이런 건 나도 그리겠다", "거의 초딩 수준인데?" 하면서 의아해했다. 이렇게 단순하고 유치한 그림이 왜 세기의 걸작인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서 말이다. 그때 생각으로는 화가라면 모름지기 진짜 사물인 것처럼 섬세한 묘사를 잘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제는 왜 그가 세기의 화가인지 안다. 피카소의 그림은 피카소적이기 때문이다. '-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멋있다. 이것이 그의 그림이 낙서가 아니라 예술인 이유다.
화풍은 글로 치면 문체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인가 하는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내가 가장 신경쓴 건 '나의 문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화가의 정신과 개성이 반영된 점, 선, 면. 이것에 해당하는 게 문체라고 생각했다. 나란 사람의 개성을 글이라는 세계 속에서 구현하고 싶었다. 내가 쓰는 단어들, 그 단어들 간의 관계, 그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이 나만의 독자적인 창조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글쓰기를 하면서 초반에는 무엇을 쓰는가보다 어떤 문체의 글을 쓰는가가 그래서 내게 더 중요했다.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보다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처럼. "나의 삶이 곧 나의 메시지"라고 말한 간디도 멋있다. 간디를 빌려 말하자면, 내 문체가 곧 나의 주제의식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글이란 게 내용에 앞서서 형식으로써 메시지를 이미 갖추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풍이란 건 후대 사람들이 이름 붙인 것일 수도 있지만,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 화풍으로써 피카소는 입체주의 화풍으로써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풍으로써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준 것'이다. 문체도 이런 거겠지 싶었다.
한번은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는데 그때 정말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오늘 인터넷에서 우연히 어떤 글을 읽는데 말이야, 꼭 네가 쓴 거 같은 거야. 그래서 혹시나 하면서 스크롤을 올려서 위에 적힌 이름을 봤다? 그런데 진짜 네 이름인 거야! 되게 신기하더라고.”
나만 들리게 조용하게 환호했다. 피카소라도 된 기분? 손화신적인 게 생겼는 말이 아니겠느냐며 내 마음대로 해석하며 기뻐했다. 이제 나도 작품을 쓰는 '작가'인 건가 하면서 말이다. 예전부터 글만 봐도 '이거 누구 글이네' 하고 단번에 알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현실에선 흐리멍덩한 캐릭터일지라도 글 안에선 선명한 색깔을 가진 스타일리시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100걸음 중에 이제 딱 한 걸음 걸었지만, 이 한 걸음이 나를 설레게 했다. 드디어 '딱 봐도 니 글'을 쓰기 시작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