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나다워진다는 것'의 정의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2. 나다워진다는 것의 정의
#4. 나의 색이 진해지다
나다워진다는 것의 네 번째 의미는 이 세상 속에서 나의 색깔을 더 진하게 드러냄이다. 다른 누군가는 절대 나처럼 못하는 일,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내 색깔을 진하게 만들기.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나만의 개성을 강화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나다움의 최종 목적지가 아닌가 싶다.
많은 가수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로부터 놀랍도록 공통된 목표를 들었다.
“나만의 색깔이 담긴 곡을 만들고 싶어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흔한 노래가 아니라 독창적이고 신선한 노래를 만들고 싶단 바람. 이것은 모두가 엇비슷했다. 결국 더 나다워지겠다는 말이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뮤지션이라면 굳이 ‘나다운 걸 만들어야 해’ 하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본인스러운 작품이 나올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것. 자기 목소리로 세상에 무언가를 외치는 것. 이것이 최상의 예술이란 걸 그들에게 배웠다.
하얀색 항아리 하나가 고추장 담는 용기로 남을 것인지, 달항아리란 이름의 작품으로 남을 것인지 그 갈림길에는 '나만의 색'이라는 기준점이 있다. 그 항아리를 만든 사람이 그것에 자신의 정신과 개성, 혼, 철학을 넣었다면 그건 단지 생활용품에 그치지 않는다. 작품으로써 미술관의 밝은 조명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장인정신' 비슷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어서 거기에 스민 작가의 내면을 절대 털어내지 못한다. 수제로 만든 구두 한 켤레가 상업적인 공간에서 쇼윈도 안에 전시돼있다 하더라도 예술혼이 느껴진다면 그것 또한 예술작품이다.
글쓰기는 나의 색을 진하게 만들도록 돕는다. 씀으로써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나에 대해 더 솔직해지고, 타인에게도 더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게 된다. 씀으로써 나다워지고 그렇게 나다워짐으로써 더 나다운 글을 쓰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선순환이다.
러시아 목제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 글을 쓴다는 건 마트료시카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인형 안에 똑같이 생긴 작은 인형이 나오고 그걸 열면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인형 속의 인형' 이미지. 글쓰기는 맨 안쪽 인형이 하는 일이다. 내 안의 내 안의 내 안의 내가 하는 일, 이것이 글쓰기다. 청소기를 돌리거나 빨래를 갤 때 우리의 정체성은 맨 바깥 인형에 가깝지만 노래를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정체성은 맨 안쪽 인형으로 달려간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제목처럼, 글쓰기는 내 안쪽으로 최대한 내려가고 내려가서 하는 행위고 그렇기 때문에 진짜 나, 또 다른 나, 솔직한 나, 못난 나, 신성한 나와 만날 수밖에 없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표정을 좋아한다. 음표 속에 깃든 영혼의 정수를 깊이 음미하는 얼굴은 그의 맨 안의 인형이 만들어낸 표정이다. 청소기를 돌릴 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정이다. 글쓰기도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누르는 일처럼 극히 개별적이고 내면적인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자를 본질 세계로 끌고 간다. 세상의 바람에 휘둘리지 않는 나를 만들어주는 건 내 안의 내가 하는 활동들이다.
나는 이것을 ‘알맹이의 일’이라고 이름 붙였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척도는 인생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알맹이의 일을 하며 보내는가에 달렸다. 여행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게 나에게는 알맹이의 일이고, 그 시간을 확보하는 건 내게 있어서 정색하고 나설 가치가 있는 싸움이다. 일상이 요구하는 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야지만 알맹이의 일을 할 시간이 생긴다. 산다는 건 시간과 시간 사이의 싸움이다. 얼마나 나다울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쟁취할 수 있느냐, 이 전쟁에 나는 꽤 결사적으로 임하고 있다. 내 인생이 쳇바퀴만 돌다가 원점인 채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창조하고 세상에 나만의 색깔로 점 하나를 찍을 것인지는 이 싸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하는 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급하면서 중요한 일
급하면서 안 중요한 일
안 급한데 중요한 일
안 급하고 안 중요한 일
내 삶을 대입해보면, 가족의 생일을 챙기는 건 급하면서 중요한 일이고 전기세를 납부하는 일은 급하면서 안 중요한 일이다. 글을 쓰는 건 안 급한데 중요한 일이고 초콜릿을 먹는 일은 안 급하고 안 중요한 일이다. 나는 네 가지 중에서 세 번째 ‘안 급한데 중요한 일’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쓰기 위해서 나머지 세 부류의 활동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려고 한다.
‘안 급한 일’에 해당하는 행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게는 글쓰는 일이 안 급한데 중요한 일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급하면서 중요한 일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안 급하고 안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모두에게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하나는, 안 급한데 중요한 일이 나만의 색을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