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나의 색깔 찾기'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3. 어떻게 쓸 것인가: 나의 색깔 찾기
#2. 매일쓴다 매직
나만의 색깔을 찾는 건 문을 열고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과 같다. 신비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두 개의 구슬이 필요하다.
구슬 하나_ 많이 쓰기
구슬 둘_ 간결화 작업
하나의 구슬로는 결코 마법을 목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먼저 '많이 쓰기'라는 구슬을 찾아나선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길이 그냥 거기 있으니까 가는 거야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야"
- 장기하와 얼굴들, '그건 니 생각이고' 가사 중
걸어가야 만들어지는 길이 스타일이다. 내가 이 길로 걸어가면 이런 스타일이 만들어지겠지, 뚝딱, 그렇게 계획하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묵묵히 쓰고 또 쓰고 나서 어느날 뒤를 돌아봤을 때 특정한 모양의 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스타일이었다. 나의 색깔을 찾는 건 지도 없이 걷는 길과 같아서 생각이 아니라 온몸으로 밀고나가면서 써야지만 만들어지는 거였다.
친구와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말했다. 자기 작품의 색깔이 무엇이다 하고 직접 정의내리는 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냐고. 다른 사람들이 내 작품을 오랜 시간 봐오며 어느 날 '당신 글의 색깔은 이런 것 같아요'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지 않냐고 했다. 별명을 스스로 지어 부르지 않듯이 말이다.
씀으로써 잘 쓸 수 있다. 씀으로써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 말장난 하려는 게 아니라 이것은 차라리 매직이다. 쓰는 행위는 결국 '나에 대한 탐구활동'이기 때문에 씀으로써 더 나다워지고, 나다운 게 묻어나는 무언가를 쓰게 된다. 그 뫼비우스의 띠 위를 쉬지 않고 걸었을 때 나는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버스가 종점으로 돌아오듯 '나'에서 출발하여 많은 길을 걷고 걸어 내 안의 나로 도착했다. 글쓰기는 어쩌면 '나'라는 원점으로의 회귀일지도 모른다.
매일 써야하고 영감님 오시길 기다리지 말고 써야 한다. 영감이 매직이 아니라 매일 쓰는 게 매직이다. 필립 로스가 자신의 작품 <에브리맨>에 이렇게 썼지 않았겠나.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나는 아마추어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예전에는 심호흡 한 번 하고 소매 걷어 올리고 앞머리 안 흐르게 머리띠 바짝하고 필통 한 번 정리해주고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이젠 그냥 쓴다. 영감을 찾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예전에는 글을 쓸 때 마치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는 얘기다.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리는 것도 글쓰기를 너무 특별한 행위로 여기기 때문이다. 요즘은 내가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 일상 속으로 글쓰기를 끌고 들어온다. 쓰는 걸 중요하고 특별한 활동으로 여기지 않을 것, 이게 나의 수칙이다. 목욕재계하는 신성한 마음으로 써야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 생각이 오히려 글을 경직되게 만든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글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상적인 에세이라면 생수가 떨어지면 사서 채워넣듯, 책꽂이의 책이 쓰러지면 세워놓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쓴다.
양보다 질이라는 말이 어느 상황에서나 들어맞을 리 없다. 쓰기의 초반에는 많은 양이 좋은 질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손화신이 손화신적인 글을 쓰는 게 좋은 질의 글이라고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선 많은 양의 손화신의 글들이 쌓여야 한다. 'OO적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세상 모든 것들은 얼마나 많은 양의 자신을 쌓아왔을까. 일단은 많이 쌓아져 있어야 그 안에서 일관성이란 것도 도출할 수 있을 테니까, 많은 길을 걸어야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큰 그림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매일 쓰는 걸로! 이 매직의 이름은 그리하여 '매일쓴다 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