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극복기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곧 있으면 3년이다. 첫 책을 출간한 게 2016년 3월이니까 벌써 그렇게 됐다. 책 한 권을 3년 동안 우려먹는 기분은 마치... 여름 지나고 가을이 왔는데 여름옷을 입고서 안 춥다고 우기는 사람처럼 참 안됐다. 출간 후 2년쯤 지나니까 "두 번째 책은 안 나오느냐"는 질문이 가끔 날아왔다. 그럴 때 겉으로는 "얼른 내야죠" 하고 태연하게 대답했고, 속으로는 '저는 어떻게요' 하고 처절한 독백을 토했다.
3년 동안 안 쓴 건 아닌데, 하나도 안 썼다. 말장난하려는 건 아니고 자초지종을 말하자면 나는 무엇을 쓸지 매일 하루도 빼지 않고 고민했고 그러다 '이것을 써야겠다'는 확신이 찾아와서 시작해보려 하는데, 이틀 후에 더 좋은 생각이 딱 떠올라서 '이틀 전에 생각했던 그것 말고 이것을 써야겠다'는 더 짙은 확신이 들어서 그것을 쓰기로 결정하고 이번에는 진짜 쓰려는데 이건 마치 운명처럼 열흘 후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생각과 더 강렬한 확신이 찾아와서 진짜 진짜 마음을 결정하고 시작하려는데...
그렇게 3년의 세월이 지났다. 초안만 구성한 원고 5개 정도가 컴퓨터에서 뭣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서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방금 이야기한 자초지종은 재밌게 말하려고 과장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하루를 살아내고 나면 그때마다 쓰고 싶은 것들이 새롭게 생겨났고, 나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욕심 많은 꼬마가 왼손에 사탕을 가득 쥐고 오른손에 초콜릿을 가득 쥐었는데 3초 후에 눈 앞에 새로운 젤리가 놓인 것을 발견하고서 대략 난감하여 양손만 내려다보고 선 꼴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돌이켜보면 '꼭 쓰고 싶은 것'이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게 너무 많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이것을 안 쓰면 안 되겠다' 싶은 게 없었다는 거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첫 번째 책보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완전히 압도됐던 것 같다. 첫 번째 책의 글과 완전히 다른 글을 쓰고 싶었고, 더 내 색깔을 찾고 싶었다. 내 글의 문제점과 부족한 점을 찾고 업그레이드 시키느라 3년을 쓴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어쨌든 글을 못 썼으니 슬럼프라고 하자. 1년까지는 사실 그 방황이 달콤했다. 2년째 접어들자 살짝 초조해지면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싶었고, 3년째가 되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렬해지면서... 무엇이든 쓰게 됐다. 무엇이든 쓰게 됐다는 건, 마치 눈밑이 퀭해진 짐승 한 마리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아니 지푸라기라도 씹어먹는 심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렇게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허무한 결말이지만 그냥 그렇게, 다시 쓸 수 있게 됐다. 브런치에 <어른, 안 하겠습니다> 매거진과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매거진을 열고서 무작정 썼다.
진리를 찾은 기분?! 3년 만에 몸으로 뒹굴며 알게 된 사실. 종교를 통합하는 하나의 진리처럼 글쓰기라는 우주를 아우르는 절대적 진리. 그것은... 쓴 것만 글이라는 것!
내가 '생각'한 것들은 글이 아니었다. 계획하고 구상하고 초안을 짠 것은 씨앗일 뿐이며 싹을 낼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가 없다. 오직 활자로써 '쓴' 것만 글이었다. 고민하느라 지새운 밤들, 마음을 꽉 막았던 고구마들을 한 자루 가득 내다팔아서 금화 하나를 얻은 기분이다. 앞면엔 '쓴 것만 글', 뒷면엔 '닥치고 그냥 써'라고 적힌 금화를 늘 안주머니에 넣고 글쓰기 라이프를 살아갈 것 같다. 이걸 손에 넣었으니 지난 3년의 세월이 허무하지 않은 게 됐다.
이 이야기는 여기 브런치에 새롭게 쓰고 있는 두 매거진의 프롤로그와도 같다. 어떻게든 나는 다시 써야 했고 브런치북 프로젝트라는 시한폭탄을 안기로 했다. 한 달간 15개의 글을 써야'만' 응모가 된다는 시간제한 폭탄을 품에 안으면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쓰겠지. 그렇게 매거진을 새롭게 만들어서 쓰기 시작했고, 쓰면서 '그냥 썼어야 했구나' 하고 깨달았던 거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밥을 해야 밥이 생기고, 개소리가 됐든 글이 됐든 글을 써야 글이 생긴다.
사실 '#브런치북'이란 태그를 적는 손이 고민으로 머뭇거렸다. 2015년 브런치북 1회 때 금상을 받았는데 6회에 또 응모한다? 양손에 사탕과 초콜릿을 쥐고 있던 그 아이처럼 내가 염치없는 인간처럼 보이면 어떡하나 주변의 눈치가(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보였다. 게다가, 브런치 메인화면 상단에 '10인의 에디터가 새로운 작가를 찾습니다'라고 적힌 문장이 분명히 말해주듯 브런치는 '새로운' 작가를 찾고 있을 것이다. 브런치에서 작가라고 불리는 영예를 3년이나 누려온 나는 해당사항 없을 확률이 99프로다('새로운'의 의미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글 잘 쓰는 사람, 재미있게 쓰는 사람, 참신한 소재로 쓰는 작가들이 지금 브런치에 아주 많다. 그럼에도 배수진이 필요했다. 나를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배수진 앞에서 비로소 28개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쓰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는 3년의 슬럼프를 깨고 나왔다.
P.S) 가수 자이언티와 박원을 취재하면서 '쓴 것만 글'이라는 진리의 힌트를 얻은 경험을 덧붙인다. 자이언티는 인터뷰에서 "노래를 만들 당시의 생각이나 감정을 곡으로 쓴다"고 했는데 이 말은 써야 할 게 매일 새롭게 생겨나서 고통받던 내게 글을 쓰려는 '지금'의 내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단 걸 알려줬다. 박원은 쇼케이스에서 "이번 앨범만 내고 안 낼게 아니라 평생 음악을 할 거기 때문에..."라며 무슨 말들을 이어갔는데, 그때 내 문제가 보였다. 난 마치 이번 책만 내고 평생 책을 안 쓸 사람처럼, 인생 최고의 걸작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했던 것이다. 그러니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평생 20권의 책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1권 정도는 완전히 망쳐도 되는 건데 말이다. 그리고 이번 책에 못 담은 것들은 다음 책에, 아니면 그 다음 책에 담으면 되는 건데 말이다.
결국 '요즘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걸작은 다음에 쓰고 이번엔 그냥 편하게 쓴다'는 마음으로 쓸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