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namon #. 반전
운전을 하면서 본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나도 내가 무서워요'도 아니고 '직진만 5시간째'도 아니고 '먼저 가, 난 틀렸어'도 아니었다. 어느 날 앞차 뒷유리에 사뭇 진지한 글씨체로 뭐가 적혀있어서 봤더니 이런 문구였다. I'm a Best Driver.
cinnamon #. 초보운전
운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초보란 걸 실감한 경우는 차선 바꾸기를 못했을 때도 아니고 도로 신호를 잘못 봤을 때도 아니고 내비게이션을 틀리게 봤을 때도 아니었다. 친구가 타던 조그마한 차를 샀는데 받고 나서 보니 원룸에 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급하게 이사를 갔다.
cinnamon #. 인연
오늘 뒤태가 기가 막힌 차를 봤다. '폐기물처리차량'이라고 적힌 파란색의 낡고 둔탁해 보이는 트럭이었는데 폐품들이 한가득 실려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작고 노란 것이 날 부르는 것 같아서 자세히 쳐다봤더니 피카츄 인형 하나가 번호판 바로 위에 치명적인 귀여움으로 매달려 있었다. 마치 포로수용소에 아무것도 모르고 붙들린 아이처럼 검정색 가느다란 끈으로 가슴팍이 단단히 고정돼 딱 달라붙어 있었다. 몰골은 안쓰러울 정도로 꾀죄죄했다. 검은색 숯댕이가 빨간색 볼연지 옆으로 번져 있었고 오른쪽 옆구리에도, 왼쪽 발목 위에도 묻어 있었다. 4시간 뒤에 나는 볼 일을 마치고 한창 귀가 중이었다. 그런데 한강을 따라 난 그 길고 긴 강변북로 한복판에서 아까 그 피카츄를 다시 만난 것 아니겠는가. 심지어 아까는 올림픽대로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내 옆 차선에 있는 피카츄 트럭을 보며 이 넓은 세상의 끝없는 도로 한복판에서 저 피카츄 트럭을 다시 만날 확률을 계산해보았다.
cinnamon #. 열창
삑사리? 괜찮다. 고음불가? 상관없다. 혼자서 운전하면 열창으로 심신의 피로를 해소하고 축 처진 기분을 전환하곤 한다. 욕을 한다 해도 상관없다. 아무렴! 상관없다. 상관없...을 줄 알았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나서 노래를 멈췄다. 차 앞유리에 블랙박스가 있었다.
cinnamon #. 아이돌
고개를 숙였다. 차마 미안해서 볼 수 없었다. 상암에서 집으로 가던 가양대교 어딘가. 정차 중에 전방 응시를 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때 난 정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앞차에선, 오늘 하루 회사에서 온갖 스트레스에 고단한 일과를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20대 후반 정도의 한 여성이 혼자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저 박자라면 방탄소년단의 '아이돌' 정도의 신남을 뿜는 노래일 확률이 높다. 손가락 총은 5방 정도로 간소하게 쏘았다. 그녀의 월급날은 언제일까. 만약 듣고 있는 것이 라디오라면... 한 번쯤은 루마썬팅 광고가 흘러나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