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한다는 건 자기를 한번 털어내는 일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 이성복 시인,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中
#18. 나를 털다, 고통을 털다
: 말을 한다는 건 자기를 한번 털어내는 일
가수 한영애가 한 신문사와 나눈 인터뷰다. “노래란 뭘까요.” 그녀가 답했다. “정화제? 마음의 주름진 것을 다 펴잖아요. 소리를 낸다는 건 자기를 한번 털어내는 거예요. 저는 많은 분들에게 노래하는 걸 권해요.” (중앙일보, 2013. 2. 15)
노래에 평생을 바친 자의 심지가 느껴지는 답변이다. 자기를 한번 털어내는 것이 노래라는 그녀의 말에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이유 또한 그것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가 물에 젖으면 파르르 몸을 흔들어 물기를 흩어버리는 것처럼, 사람도 마음이 물에 젖으면 그걸 털어버리고 싶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친구를 붙잡고 소주 한잔에 넋두리를 담고 커피 한잔에 수다를 실어보내는 것 아닐까. 마음속 군더더기 싹 씻어내고 알맹이 가슴만 남기기 위해.
고통은 말이 되어 몸 밖으로 나왔을 때 더 이상 고통이 아닌 것이 된다. 나 자신과 하나라고 여겨졌던, 자아에 엉겨 붙어있던 고통을 탈탈 털어내 몸 밖으로 끄집어내면 비로소 ‘나는 나, 고통은 고통’으로 타자화他者化 시킬 수 있다.
스피치 동호회에서 만난 한 60대 연사님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에게 말이란 고통을 털어내는 작업이었다. 그는 회원들에게 어느 날 이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60대 수강생 김민철(가명)입니다. 저는 요즘처럼 행복한 때가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10여 년 동안 암 투병생활을 하면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피폐해져 갔습니다. 무력감과 지독한 우울증이 저를 괴롭혔고 심한 대인기피증도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3~4명만 모여 있어도 그들 앞에서 말을 하려면 떨려서 서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예전에 사업을 할 때는 수많은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격려도 하며 카리스마 있게 리드했는데, 그때의 제 삶이 마치 꿈속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바보 같은 나만 남았구나' 그렇게 자책만 하다가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감 있던 제 모습을 찾고 싶었습니다. 늦은 나이지만 용기를 내어 스피치 학원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저의 불안한 심정을 남김없이 털어놨습니다. 연사님들은 제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원장님은 ‘이 곳은 스피치 학원이면서 치료도 겸하는 곳’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치는 심정으로 매일 스피치 학원 겸 동호회인 이곳에 나왔습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고통스러웠던 대인공포증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석 달째인 지금, 우울증에 시달리던 무력한 저는 이제 없습니다. 저는 자신감을 회복했습니다. 인생도 되찾았습니다. 저는 말을 잘 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 앞에서 자신감 있게 나를 드러내고, 내 삶의 주인으로서 당당한 저를 찾고 싶었습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이 땅 위에 두 발 딛고 서 있는 당당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겁니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힘들었던 때를 털어놓는 건 저 자신을 치료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몸도 마음도 건강합니다. 요즘은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말을 하는 것, 노래를 하는 것, 춤을 추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자기를 툭- 하고 한번 털어내는 일들이다. 때론 말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느냐, 무엇을 얼마나 잘 말하느냐가 새의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말을 한다는 그 자체로, 고통을 털고 내가 다시 태어나는. 그럴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