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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7. 2021

19. 선생님이 나한테 凸했다

욕을 해선 안 되는 이유

나는 욕을 거의 안 하는 편이다. 욕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손가락' 욕은 즐겨 사용했다는 말이다. 특히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장난 치면서 손가락 욕을 남발했었다. '뭐래' 같은 느낌으로 사용했달까?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가장 기본적인 가운데 손가락부터, 양손으로 주먹을 쥔 뒤 양쪽 새끼 손가락만 세워 둘을 붙여준다거나, 볼 양 옆에 주먹을 갖다 댄다거나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凸(볼록할 철) 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탓에 손가락 욕을 가볍게 여기고 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있을 때만 사용하니까. 그런데 습관이 참 무섭다. 그날 이후 나는 가운데 손가락은 없는 셈 치고 산다.


22살 겨울방학에 단기 학원 알바를 했다. 원래 일하던 분이 입원치료를 받아서 쉬는 2개월 동안만 일하면 됐다. 방학 때 하기 좋은 꿀알바였다. 초등학생들 영어 봐주는 일을 하면 됐다. 아이들은 교재와 씨디로 알아서 공부하고, 나는 진도만 체크해 주면 됐다. 세상 편할 것 같았다.(착각이었지만.) 나는 인수인계를 받으러 갔던 날 내 전임자의 얼굴을 보고 의아해 했었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장난치자 내 전임자의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모든 분노를 얼굴 근육으로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겨우 애들인데 뭘 저렇게 열 받아하지? 오만한 생각이었다.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훨씬 밖에 있었다. 공부 하기 싫다는 애, 놀고 싶다는 애, 실제로 노는 애, 놀지 말라고 하면 삐지는 애, 친구랑 대화하는 애, 대화하다가 싸우는 애들, 그걸 나한테 르러 오는 애, 내가 편 안 들어줬다고 뛰쳐 나가는 애, 그때 열린 문 틈 사이로 좋다고 튀는 애, 막상 보내주겠다면 다시 들어오겠다고 난리치는 애, 그리고 무한 반복. 힘들었다. 열 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끊었던 일기장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날 있던 일을 쓰다 보면 5장은 그냥 넘어갔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풀 게 많아서) 일기는 점점 밀렸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초등학교 2학년 반에 맨날 말썽 피우는 남자애들 둘이 있었다. 그날 둘이 싸우다 내 앞으로 불려왔는데, 나하고 말장난을 하려고 했다. 일부러 너(그러니까 나)를 열받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무시했을 것이다. (이미 친절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 애들이잖아. 아, 그 다음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나를 욱하게 만든 트리거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는 '뭐래'라는 생각으로, 무의식적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아이가 벙쪄서 말했다. "와, 선생님이 나한테 뻐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당황해서 곧바로 사과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어른들이 말하던 방식으로 말했다. "선생님이 욕한 건 정말 미안해. 그래도 네가 한 짓은 정말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내 잘못도 있지만, 네가 잘못했기에 그랬다는 말. 정말 최악이었다.


고2 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보면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이해하지 못했다. 주인공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뒤 심한 신경증에 시달린다. 스쳐가는 바람에도 화들짝 놀라며 죄책감을 느꼈다. 밤에는 잠도 못 자고, 아무 것도 못했다. 죄를 들킬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당시 나는 주인공이 과민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등학생한테 욕을 하고 깨달았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만큼 버틴 게 용했다. 그날 밤부터 3일 동안 잠을 못 잤다. 원장한테 전화가 올까봐 무조건 무음으로 해놓던 핸드폰도 진동으로 바꿨다. 나는 나쁜 소식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망상에 시달렸다.



[망상 극장]


#1. 들키는 과정


엄마와 아이들이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와 여동생이 장난을 친다. 장난은 싸움으로 번진다. 남자아이는 동생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다. 그걸 본 엄마가 화들짝 놀란다.


엄마: 너, 그런 거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남자아이: 영어 선생님이 나한테 했어.

엄마: 또 거짓말하지 말고.

남자아이: 진짜야! OO이도 보고, 반 애들도 다 봤어. 아, 진짜!

엄마는 잔뜩 열 화가 나서 학원에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를 지른다. 얼굴은 이미 달아 올라 있다.


엄마: 거기 영어 선생 미친 여자 아니에요? 애한테, 나 원 말하기도 민망해서, 욕을 했다는데, 이게 말이 돼요?

원장: (화들짝 놀란 목소리) 네? 어머니 무슨 소리죠?

엄마: 애가 선생님한테 욕을 배워왔다고요!

원장: 아... 제가 한번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엄마: 됐어요. 지금 당장 갈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그 선생 데려다 놔요.


#2. 대면


나는 원장실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원장은 내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원장: 아니, 선생님, 그래 이게 무슨 일이야. 조심했어야지.

나: (잔뜩 주늑든 목소리로)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원장: 진짜 창피한 줄 아세요. 진짜 나도 어떡해야 할 질 모르겠네. (발을 동동 구른다.)


어머니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는다.


어머니: 너야? 진짜 미친 여자 아니야! 애 앞에서 욕 해도 안 되는 걸, 애한테 욕을 해요?


어머니가 내 멱살을 잡고 막 흔들자, 내 고개가 막 움직인다. 원장은 말리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죄송한 눈빛으로 원장 선생님을 바라본다.


#3-1. 내 반응: 무조건 빈다.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어머니한테 빈다.


나: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제가 죽일 년이에요. 저는 죽어야 마땅해요.

어머니: (빌빌 기니까 더 열받는다는 듯)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어머니가 내 따귀를 때린다. 나는 더욱 비참한 표정으로 더 비참하게 빈다.


나: 죄송해요. 용서해 달라는 말도 안 할게요.


#3-2. 내 반응: 그래도 따귀 맞으면 꿈틀거려야지.


내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비는데 어머니가 내 따귀를 때린다. 눈물을 거두더니 내 눈빛이 돌변한다. 그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나: 어머니. 제가 큰 잘못을 한 건 맞지만, 따귀를 때릴 거까진 없잖아요.

어머니: 뭐? 이거 진짜 또라이 아니야!

나: 그래요, 저 또라이에요!


어머니가 내 머리채를 잡는다. 나도 지지 않고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는다. 원장 선생님이 우리 둘의 싸움을 말린다.


원장: 정말 선생님, 왜 이래요. 어머니도 진정 좀 하세요.


#3-3. 내 반응: 뻔뻔함


(다시 #2 마지막 신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려고 하는 순간 내가 어머니 손을 쳐낸다.


어머니: 뭐야, 뭘 잘했다고 이래? 이거 진짜 미친년 아니야?

나: 그래요, 저 미친년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아셔야죠. 그쪽 아들이 저를 얼마나 괴롭혔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겠어요.

어머니: 그쪽? 이거 미친 줄은 알았는데 상상 이상이네!


어머니가 내 따귀를 때릴 준비를 한다. 내가 눈치 채고 재빨리 손목을 낚아챈다. 어머니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어서 재빨리 반대 싸다구를 날린다. 내 얼굴이 아파온다. 그리고 열받아서 머리로 어머니를 들이받는다.


#3-4. 내 반응: 회피


어머니가 내 멱살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내가 몸을 뺀다.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 제가 잘못한 거 압니다. 오늘부로 그만두겠습니다. 어머니께는 정말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어서 더욱 죄송합니다. 우선 사과는 했지만 아이의 상처가 지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송구합니다. 원장 선생님 탓은 하지 말아주세요. 다 제 잘못이고, 제가 부족한 까닭입니다.

어머니: (뭐지 하는 표정)

나: 안녕히 계세요.


나는 원장실을 유유히 나와 사라진다.


#4. 슬픈 전설

우리 동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한 선생의 이야기가 떠돈다. 아이들은 욕을 하고 어른들에게 들켜 혼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OO 학원 영어 선생님도 했어요!" "욕하더니 거짓말까지?" 어른들은 믿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자주 들은 탓에 이야기의 출처를 찾기 시작한다. 동네가 좁아서 이야기는 우리 엄마 귀에까지 들어간다. 엄마는 침울해 있는 내게 재밌다는 듯이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웃지 못한다. 엄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엄마: 왜 그래?

나: (울먹이며) 엄마, 그거 나야!

엄마: 뭐?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말해!

나: ....

엄마: 미쳤어, 미쳤어! 창피해서 어떻게 살아

나: 우리 어떡해?

엄마: (고민하다가 결연한 목소리로) 어떡하긴, 떠나야지.


우리 가족은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슬픈 전설이 떠돈다. 초등학생한테 손가락욕을 하고 동네를 쫓겨나듯이 떠났다는 어떤 아둔한 여자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끝




이런 망상 속에 시달리며 핸드폰 작은 진동에도 화들짝 놀라 파르르 떨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한마디로 창피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 안심했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일주일은 넘게 벌벌 떨었다. 그때 '죄와 벌'을 아주 처절하게 경험했다. 이후로 나는 손가락 욕을 하지 않는다. 완전히 끊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 같은 일을 겪기 전에 욕을 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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