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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8. 2021

21. 당신은 왜 글을 쓰십니까?

저는 이래서 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한다. 자기 표현의 욕구, 지식 전달, 위로 등 다양하다. 그러나 내가 봤을 때, 이 설명들은 우리가 글을 쓰는 본질적인 이유를 외면하고 있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보여지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브이로그라는 장르가 창궐했을 때 나는 사람들이 관음증적 시선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을 남들이 봤으면 하는 욕구가 이렇게도 만연해 있던가 생각하며 조소를 날렸다. 미디어 시대를 '관종들의 시대'라고 혼자 정의했었다. 그러다 PD 준비를 위해 들어갔던 작문 스터디에서 한 남자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PD 준비하는 사람들은 전부 내적 관종이라고 보는 게 맞아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SNS를 전혀 안 한다. 카톡 프사도 비워두는 게 싫어서 만화 캐릭터로 해놓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구보다도 세상의 관심을 바라는 사람이란 걸. 다만, 그 관심의 대상에 내가 쓴 글이길 바랐다. 나도 결국엔 (내적) 관종이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관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는 작은 관심이든, 큰 관심이든, 어떤 관심이든 받길 내밀히 소망한다.(여기서 작은 관심이란 주변 사람들과 갖는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관심을 말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왜 보여지길 소망하는 걸까?


웅장한 단어로 정의내려 본다. 다름 아닌, '불멸'이다. (그리고 오늘도 밀란 쿤데라다. 나의 영웅!) 밀란 쿤데라는 소설 <불멸>에서 작은 불멸, 큰 불멸, 우스운 불멸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기억에 남음으로써 불멸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상상도 하기 싫지만)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부모님이 원하건 원치 않건 내 기억 속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불멸할 것이다. 내가 만약 아이를 낳아 나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부모님은 그 아이의 기억 속에서 불멸할 것이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불멸한다. 그리고 언젠간 글로도 쓸 생각이다. 내가 글로 남긴다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글 속에서 불멸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알고 있다. 그래서 불멸을 무의식적으로 꿈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보여지길, 그럼으로써 기억되길, 결국에는 죽음을 피함으로써 불멸하길 간절히도 바라는 것이다. 모두가 관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우리는 불멸하기 위해 글을 쓴다. 불멸의 충분조건은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읽힌 후에야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작자의 근본적인 욕구는 '보여지는 것'이 된다. 보여져야 기억되니까. 그렇다면 어떤 글이 보여지고 기억될까?


며칠 전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나온 신우석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 또한 신우석 감독이 만든 모바일 게임 '연극의 왕' 광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었다. 15초짜리 광고도 견디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10분짜리 광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할 수 있었을까?


신우석 감독은 광고 제작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스킵(skip)'이라고 했다. 보여지지 않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신우석 감독이 선택한 전략은 '요약 거부'였다. 광고 내용은 요약되지 않는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수 없어 우리는 끝까지 보게 된다. 이렇게 물으면서. 그러니까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고요!


'요약 거부'는 세상이 말하는 글쓰기의 정석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글은 주제가 한눈에 파악되는 글이라고. 하나의 키워드로 표현되고, 하나의 문장으로 보여질 수 있는 글이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봤을 때, 그런 글은 다 읽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의 문장으로 파악되는 글을 뭐하러 다 읽는단 말인가. 그것도 첫 문장, 첫 문단에 다 파악할 수 있는 글을 말이다. 이런 글로 우리는 기억될 수 없을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불멸할 수 없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요약되는 글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장은 자신이 안고 있는 이런 고민을 솔직히 토로한다. 그는 글을 쓰는 중에 사람들이 자기 글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길 바란다. 그가 쓴 문장 하나하나가 기억되길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그도 알고 있다. 읽다가 지겨워진 사람들은 몇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다가 눈에 띄는 문장부터 읽기 시작할 거라는 걸. 당장에 글을 읽고 있는 그도 그러고 있으니까. 그래서 거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하나 읽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쓰겠다! '요약되지 않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내가 봤을 때,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지만, 가장 많이 그리고 여러번 읽은 책은 밀란 쿤데라의 책이다. 한번 보고선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번에 전체를 파악할 수 없도록 이야기를 다면적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요약하고 싶다는 욕구(통제욕)에 사라집힌 독자는 밀란 쿤데라의 책을 다시 읽는다. 다시 읽다보면 이전에 보지 못한 내용을 발견한다. 그러면 새로운 발견에 즐거워하다가도, 이전에 읽은 내용과 다르기에 당황한다. 이전과 느낀점이 다르다면, 이전에 잘못 읽었거나 지금 잘못 읽은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읽는다. 그리고 다시, 다시, 또 다시, 다시가 반복된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장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글을 꾸준히 올리면서 처음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띄엄띄엄 읽으면서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는 내 모습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더 잘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주제를 잡고, 한 가지 이야기로 풀어나려고 노력했다.(글쓰기 수업에서 배웠 듯이. 논리적으로.) 그러다 '유퀴즈'에 나온 신우석 감독의 말을 보고 마음을 고쳤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예정이다. 궁금해서 계속 읽고 싶은 글, 읽고나서도 한눈에 파악이 안 되어 다시 돌아봐야 하는 글, 그리고 나만 이해가 안 되는 건가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 그런 글을 쓸 작정이다. 어쩌면 나의 글쓰기 스승인 기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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