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했을 때 미쳤다고 느낀다
말했듯이 나는 블리디미르 나보코프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보코프를 스타덤에 올려준 소설 <롤리타>는 그렇게 재밌게 읽진 못했다. 나는 나보코프가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나보코프는 미국으로 간 후 영어로 소설을 썼다. 그탓인지 문체가 조금 달라졌다. 원래도 만연체였는데 더 심한 만연체로 바뀌었다. 소설의 문장이라기보다는 시 문구에 가까워졌다. 내가 알기로 나보코프의 첫 작품은 시집이었다. 최초의 본성으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보코프는 시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보코프가 결국 소설을 택한 이유는 그가 아이러니와 시니컬리즘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보코프는 통속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소설에는 통속을 비꼬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통속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통속 요소들 가져다가 마구마구 꼬아버린다. 내가 나보코프를 좋아하는 이유다.
내가 좋아하는 나보코프 작품들은 그가 독일에 있을 때 러시아어로 썼던 작품들이다. 그 당시 작품들은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테마를 공유하고 있다. '나와 세상의 괴리'가 그것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세상은 내게 만물을 이루는 세상 그자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우리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바깥의 세상과 나의 세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절망을 '사랑하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우리는 기브앤테이크를 추구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내가 준 것을 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바라고 있으면 세상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미친 거 아니야? 너는 불충분해." 나는 소설 <절망>이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민음사 문학전집을 의무감으로 읽고 있던 때였다. 소설 <롤리타>는 정말 꾸역꾸역 읽었다. 보통은 완독한 것 자체만으로도 스스로를 기특해 한다. 하지만 <롤리타>를 읽고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느낌에 빠졌다. 왜 세상 사람들은 이 소설에, 이 소설을 쓴 작가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소아성애자에 대한 통속적인 관심 탓인가? 왜냐하면 이 소설은 인기를 얻기에는 너무도 루즈했다. 그러다 이 책은 어쩌면 대중들이 아닌 학자들이 좋아하는 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문학과를 전공하면서 소설을 많이 읽었다. 논문도 많이 읽었다. 논문을 쓰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좋아하는 책에는 공통점이 있다. 은유적이어서 해석은커녕 내용 파악조차 어려운데, 그래서 연구할 부분은 많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포크너가 있다. 이야기는 비밀스러운 듯 하지만 폭발적인 힘으로 앞으로 뻗어나간다. 그만큼 스토리텔링에 힘이 있지만, 묘하게 재미없고 이해하기 어렵다. 심리학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라고나 할까. 나는 강의에서 <팔월의 빛>을 억지로 완독해야 했다. 정말 재미없고 난해했는데, 관련 논문을 읽으면서 소설을 재평가하게 됐다. 이 소설에 이렇게나 깊은 뜻이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때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대중이 좋아하는 책과 학자들이 좋아하는 책은 같기 힘들다고.
나보코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같은 교수님의 수업에서였다. 돈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라는 책을 읽었다. 교수님 취향은 난해한 편이었다. 그래도 이 책에서 나름의 수확을 얻었다. 마지막 부분이었던 거 같은데, 주인공은 어떤 남자를 총으로 몇 번이고 쏜다. 보통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였다면 남자는 찬란할 정도로 잔인하게 즉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남자는 총을 몇 번이고 맞아도 죽질 않는다. 죽음이 유예되고 또 유예되고, 결국엔 주인공이 병원에 데려간다. 웅장한 순간은 짧고 굵어야 한다. 그래야 웅장함이 표현될 수 있다. 웅장함이 유예되면 유예될 수록 그 무게를 잃고 우스워진다.
통속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니컬리즘의 대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보바리 부인은 약국에서 독약을 훔쳐 자살을 시도한다. 자신의 비참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약을 단숨에 삼킨다. 보바리 부인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상상했을 것이다. 약을 먹자마자 슬픔에 젖은 채로 죽음을 맞이 하는 순간을.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죽음이 지독할 정도로 유예된다. 보바리 부인은 바로 죽지 않는다. 속이 불편해지더니 입으로 거품이 나온다. 몹시도 힘들어진다. 죽어지질 않는다. 내 기억으로 아마 그렇게 며칠을 버티다가 속이 쓰린 채로 죽었을 것이다. 죽음에서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일어나는데, 하물며 인생의 다른 것들은 어떨까. <보바리 부인>은 지독히 현실적인 소설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만든다.
나는 <화이트 노이즈>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논문을 찾아보다가 <화이트 노이즈>의 총질 장면이 <롤리타>의 마지막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나보코프는 죽음을 유예시키는 작가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학자들의 관심과 별개로 나보코프를 다시 보게 됐다. 그의 시니컬리즘은 다른 소설에서는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해졌다. 2017년 여름, 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전집을 찾아봤다.
시니컬리즘은 광기와는 안 어울려 보이지만, <절망>을 보면서 어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니컬리즘은 한국말로 냉소주의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냉소주의는 '다른 사람의 의도에 대하여 일반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태나 태도'를 말한다. 너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냉소주의의 골자다. 너의 세계는 잘못됐다는 말은, 너의 생각은 틀렸다는 말이고, 곧 너는 틀렸어라는 말이 된다. 이는 즉 너는 미쳤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절망이 '나와 세상의 괴리'에서 온다면, 절망의 결과물은 광기다.
소설 <절망>은 어느 광인의 일기다. 주인공은 망해가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출장을 갔다가 돌파구를 찾는다. 바로 그와 똑같이 생긴 걸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천재적인 계획을 마련한다. 사망보험을 든 다음 자신과 똑같이 생긴 걸인을 보험금에 대한 증거물로 내미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보험금으로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소설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간다. 독자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의외로 계획은 주인공의 의도대로 진행된다. 변수는 마지막에 나온다. 주인공은 시골 마을에서 보험금을 타올 아내를 기다리다가 신문을 보게 된다. 어떤 미친 남자가 살인을 하고 그 시체를 자신인 것처럼 위장해 보험금을 타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1면에 실려있다. 거기에는 그의 아내의 인터뷰도 실려있다. 남편이 최근 들어 이상했다는 것이다. 남자는 신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계획은 완벽했기 때문이다. 걸인은 그와 똑같이 생겼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엄청 달랐다. 남자는 세상의 눈을 믿을 수 없기에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써내려간다. 어느 시골 호텔방 안에서.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소설을 읽고 주인공이 미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놀랐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절규한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너는 미쳤다고. 남자는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글을 써내려 간다. 믿어달라며, 절망한 채로. 그런 점에서 <절망>이라는 소설 제목은 참 잘 지은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롤리타>가 험버트의 감옥의 독백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롤리타>는 험버트의 광인 일기다. 자신의 진실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이야기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험버트의 시선에 공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소름 돋았다. 험버트의 탐욕스러운 시선에 동화되어 있던 것이다. 광기, 이 무서운 말은 어쩌면 우리 도처에 널려 있을지도 모른다.
2020년 나는 내가 미쳐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절망한 상태여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나와는 너무 달라서 절망했고, 세상이 나와는 너무도 달라서 내 기준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극한의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미친 것 같다며 자책한다. 절망과 광기, 이 둘은 공전하며 우리 삶의 궤도를 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