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드 Jul 23. 2021

37. 엄마의 세계

어느 찌질이의 엄마에 관한 단상


2021.2.11


나는 '엄마'란 존재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엄마가 반대할 때 항상 목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존재가 부정 당한다고 느꼈다. 나는 그 이유가 내 세계가 '엄마의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세계 속에 안정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때때로 내 존재는 엄마의 세계와 상충했다. 얼마 전, 결국엔 엄마의 세계를 언젠가 떠날 수밖에 없음을 직감했다. 요즘은 엄마의 세계를 떠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만화 '원피스' 주인공들에게는 엄마가 없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모험과 연결지어 설명했다. 엄마가 있으면 모험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나는 엄마의 방해를 받았다. 신문방송학과나 미디어학과를 가서 영화감독에 되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겨우 기술직이나 하려고?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당시 나는 나의 가치관과 엄마의 가치관이 일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약간의 다툼과 반항이 있었지만 결국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 후로도 엄마는 내가 공무원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끊임없이 밝히며 나의 세계를 설계해 주려고 했다. 엄마의 설계는 안정성을 향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엄마의 세계는 안정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엄마의 세계를 깨지 않는 이상 모험은 영영 없을 지도 모른다.


엄마의 세계가 나의 모험을 방해한다고 해도, 엄마는 여전히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다. 삶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엄마 같은 존재는 필요하다. 집사부일체에 나온 소이현 인교진 부부를 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엄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이현 씨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존재." 이 포인트에서 차은우가 울면서 화제가 됐다. 차은우의 사정을 알 순 없지만, 그가 엄마의 세계를 떠난 외로운 모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은우는 불안한 모험을 끝내고 싶어하는 속내를 드러냈다. "결혼하고 싶어요." 엄마의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해석된다.


내가 봤을 때, 엄마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3가지다. 어린시절부터 함께 한 엄마와 이루거나, 살면서 엄마 같은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거나, 내가 직접 엄마가 되거나. 엄마와 견고한 세계를 이뤘다고 해도 보통 이는 영원하지 않다. 엄마는 언젠가 떠난다. 어느 식당에서 할아버지 4명이 술을 먹으면서 하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나 이제 고아잖아." 그렇다. 우리는 언젠가 고아가 될 운명이다. 나도 언젠간 그렇게 될 것이다. 진짜 엄마를 잃었을 때 우리가 엄마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2가지다. 결혼하거나, 애를 낳거나.


나는 결혼에는 관심이 없지만 언젠간 애를 낳고 싶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농담처럼 웃어 넘겼다. 그러나 나는 진심이다. 나의 바람에는 든든한 내 편을 얻고 싶다는 욕망이 깔려있다. 그렇다. 내 인생에서 어찌됐든 엄마는 항상 내 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도 항상 엄마 편이 될 거라고 스스로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와 자식 간 유대감에서 나오는 힘을 믿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결혼은 하고 싶지만 애는 낳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주변 여자들은 대부분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는다. 학자들은 내가 소속되어 있는 MZ 세대 여성들의 출산 거부 현상을 경제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 경제학적으로는 아이를 낳고 키우려면 그 만큼 많은 자원(돈)이 들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거부한다고 해석한다. 사회학적으로는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싶은 여성들이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육아를 포기하고 일을 선택한다고 해석한다. 타당한 해석들이다. 나는 여기에 실존적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친한 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가 결혼과 출산에 대해 이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결혼은 모르겠고 애는 무조건 낳고 싶다고 했다. 반면 언니는 결혼은 빨리 하고 싶지만 애는 절대로 낳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반박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대화를 넘겼다. 우리가 즐겨쓰는 말처럼 이는 취존(취향존중)의 영역이었다. 그래도 언니와 헤어져 집을 가는 길에 각자의 취향에 대해 생각했다. 취향이 발생한 배경이 있을 터였다.


2021.7.23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5개월이 흘렀다. 사실 나는 그 사이 '엄마의 세계'에 관해 더 고민해보지 못했다. 엄마의 세계와 본격적으로 멀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 집을 나오게 되었고, 엄마는 자신의 일을 시작하면서 바빠졌다. 우리의 유대관계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엄마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까?


얼마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결혼과 출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는 결혼할 생각은 있지만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나는 이전과 달리 내 생각을 밝히지 못했다. 예전의 나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명확히 밝혔었다. 그러나 지난 5개월 동안 엄마와 멀어지면서 어쩌면 내 생각과 달리 엄마와 자식 간의 유대에는 유통기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올해부터 엄마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일을 멈추었다. 나의 세계를 설명하기엔 우리 둘 사이 간극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엄마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이다.


다시 '취향'에 관해 생각했다. 결혼을 믿는 사람과 출산을 믿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엄마의 세계를 생각하면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스티브 지소의 해저 생활>의 한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주인공은 자신이 자식을 가지지 않고, 가지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가 싫었어. 그래서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 주변 친구들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가 어쩌면 '어머니가 싫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머니가 싫어서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어머니를 싫어하느냐?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어머니를 안쓰러워한다. 옆에서 지켜본 어머니의 삶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켜본 어머니의 삶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희생한다. 남편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 어머니는 참는다. 화가 나는 순간에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속으로 삭힌다.(가정, 그까짓게 뭐라고!) 그래서 어머니는 아프다. 화가 너무 쌓이고 쌓여서 속이 엉망진창이다.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이지만, 너무 안쓰럽기에,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안쓰러운 삶을 사는 어머니가 밉다.


나는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괜히 심통나 있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가 안쓰러우면서 미웠다. 하기 싫다면서도 할 수밖에 없어서 몸을 움직이는 엄마가 미웠다.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서 전을 하겠다며 나서는 내 자신도 싫었다. 나는 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뜨거운 기름불 앞에 서있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나 엄마가 전을 필요로 하기에 짜증나는 마음을 꾹 참고 제사 전날 전을 부친다. 나는 그렇게 엄마의 마음을 느낀다. 안쓰러우면서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래서 나는 제삿날 괜히 심통이 나서 엄마와 싸웠다. 엄마는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걸 또 엄마 혼자 하는 꼴은 볼 수가 없어서 툴툴대면서 엄마를 도왔다. 이런 헛된 노동을 당연시 하는 아빠가 미웠다. 그런데 화는 엄마한테 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의 세계란 그렇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화풀이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말이다.


내 편협한 사고로 판단했을 때 내 친구들은 그래서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거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는 거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친구들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왜 여전히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걸까?


내 객관적인 판단으로는 내가 애정결핍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버림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내가 우리 엄마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 망설이지 않고 엄마의 세계를 택할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딸들은 엄마에게 화내면서도 가장 먼저 엄마를 생각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엄마를 택하는 일은 훨씬 쉬워진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의 세계를 가장 안전한 세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찌질하기가 찌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스티브 지소의 해저 생활>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어느날 그를 찾아와 자신을 아들로 소개하는 남자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인공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정자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찾아온 남자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들로 받아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영화는 주인공이 가장 믿고 의지하던 친구를 잃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마 그 친구는 그에게 '엄마의 세계'를 구축해 주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주인공은 일적으로나, 인간관계로나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의지하고 의지받을 수 있는 관계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 아들이라는 자가 나타나 제일 친한 친구가 되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아들과 딸이라는 호칭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이쯤되니 이런 생각이 든다.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결국에는 내 생의 '가장 눈부신 친구'를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게 그런 친구가 있었던가? 찌질하기가 찌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작가의 이전글 '불'장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