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15분이나 지각한 여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 “밥 안 먹어”라고 말했다. 여자는 무심함을 가장한 태도로 “그래 먹지 마”라고 답했다. 여자는 남자의 반복되는 실험에 지친 상태였다. 남자의 반복되는 유치함에 심장이 식어버렸다. 남자는 당황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갔다. 밤새 뒤척이며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새벽 2시에 여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자니?” 1이 사라지더니, 읽씹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가기로 했다. 버스로 1시간이었다. 이동 중에 남자는 카톡의 함의에 대해 생각하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회초리를 맞은 날 남자는 침대에 엎드려 울며 아버지를 평생 미워하리라 다짐했다.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할 방법을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방문을 살짝 열더니 물었다. “자니?” 남자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 자는 척을 했다. 아버지는 남자의 옆에 오더니 다리에 약을 발라 주었다. “우리 아들, 미안해.” 아버지는 자책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때 두 가지를 느꼈다. 아버지의 사랑과 자신의 관계상 우위. 남자는 여자의 읽씹이 자신들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사랑과 여자의 우위.
이 세상에는 2가지 사랑이 있다. 하나는 부모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연인 간의 사랑이다. 개인은 부모를 통해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한다. 부모의 사랑은 일반적으로 맹목적이고 헌신적이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사랑의 원형을 배운다. 동시에 사랑해 주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방법을 깨닫는다. 어린아이들은 ‘흥’하고 고개를 돌리며 “나 밥 안 먹을래”라고 말한다. 그 나잇대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알기 때문에 아이가 그런 말을 하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부모는 허둥대며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대령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이용한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가장 먼저 배우는 사랑은 권위적 사랑이다.
연인 간의 사랑은 사춘기 아이들이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새로운 사랑은 그들이 알고 있던 사랑과는 많이 다르다. 나는 상대를 사랑하지만, 상대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으로 사랑 앞에 움츠러들고 의기소침해 진다. 설사 운이 좋아 상대방의 마음이 나와 같더라도 기쁨은 잠시다. 새로운 사랑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확신을 줬다가도 한 순간에 회수해 간다. 아이들은 이 불안한 감정을 쥐고 싶지 않아 새로운 사랑을 익숙한 사랑으로 돌리려고 한다. 자꾸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 우리는 사랑의 원형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연인간의 밀당은 사랑의 원형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누가 어린아이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냐를 갖고 다투는 주도권 다툼이다. 보통은 엎치락뒤치락 하며 균형이 유지된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지지 않으리라 마음먹는 순간 이 균형은 무너진다. 이는 실험자의 강요에 피실험자가 불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오늘 여자는 뭔가 달랐다. 열심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여자 쪽에서 재미없다며 줄을 놓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이 변형된 사랑을 바로잡아야 한다. 여자의 자취방을 두드렸다. 남자는 처음에는 굽히고 들어갔다. 여자가 문을 열자 산책하자고 했다.
여자의 집은 노량진이었기에 30분만 걸으면 한강대교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다. “내가 화낸 건 미안하지만, 네가 그렇게 가버리니까 많이 서운했어.” 여자도 진심을 말했다. “나도 늦어서 미안했지만, 네가 그렇게 화내니까 너무 서운했어.” 여자는 남자에게 져줄 생각이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여자의 잘못을 30분 동안 지적했다. 남자는 여자의 잘못이 자신을 얼마나 열 받게 하는 지 보여주기 위해 패딩을 벗었다. 반팔 차림이었다. 1시간 동안의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남자는 한강대교를 떠나며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 패딩을 여자가 보는 앞에서 패대기치고 떠났다. 여자는 패딩을 한강에 던져버렸다. 안타깝게도, 연인 간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 될 수 없다. 남자는 여자에게 고통을 줄 수 없었다. 추웠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