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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Feb 16. 2021

36. 아버지의 밥

무능함이 두렵다

어렸을 때 화가 나면 나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 부모님은 안절부절 못했다. 나는 밥으로 부모님을 조종하려고 했다. 밥으로 부모님을 굴복시키려고 했으며, 실제로 굴복시켰다. 유치원 때까지의 이야기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내가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 당장 밥을 먹으라고 명령했다. 더 이상 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아빠의 호령은 꽤 위협적이어서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었다.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밥투정을 금지했다. 개인적인 일로 가장 슬프고 비참한 순간에도 아빠는 화를 내며 내게 어떻게든 밥을 먹이려고 했다.


이번 명절에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일어섰다. 밥그릇을 싱크대에 갖다놓으려는데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장 자리로 돌아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식탁과 싱크대는 기역자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나는 아빠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빠의 화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굳었다. 어렸을 때는 아빠를 무서워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겠지만, 20대 후반인데도 몸이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세삼스러웠다. 나는 한차례 더 반항하기 위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아빠는 평소 그 욱하는 성질을 못 참고 젓가락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다시 한번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밥그릇을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그리고 흰쌀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진  순간, 젓가랑이 방바닥에 내팽겨쳐진 순간, 나는 아빠에게 맞는 장면을 상상했다. 아빠는 벌떡 일어나서 내게 다가온다. 거대한 손바닥을 들어 내 뺨을 때린다. 그 위력이 어마어마해서 나는 방바닥으로 나가떨어진다. 아빠는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발로 나를 밟는다. 나는 머리며 허리며 다리며 할 것 없이 두드려 맞는다. 짓밟힌다. 이런 상상을 하며 차라리 쥐어 터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다가도 나는 겁에 질려 자리로 돌아간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아빠에게 그렇게까지 맞아본 적은 없다. 다만, 어렸을 때 아빠에게 혼날 때 아빠가 형성했던 위협적인 분위기가 어린 나에게 이런 장면을 그리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빠의 화난 목소리는 폭력을 상기시키고, 20대 후반에 되어서까지 공포에 떨게 한다. 어렸을 적 공포를 되새기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아빠는 왜 그렇게 밥에 집착하는 것일까? '아버지의 밥'이란 무엇일까?


장예모 감독의 영화 <황후화>를 보고 감상문을 쓴 적이 있다. 영화는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빛이 난다. 화려한 자금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영상 만큼이나 연출이 장엄하다. 화려함 속에 폭력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황후는 정해진 시간에 황제가 먹으라는 한약을 먹어야 한다. 정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황후의 시간은 멈춘다. 궁녀들만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격식을 갖춰 황후에게 한약을 먹이고, 입을 닦을 손수건을 제공하고, 마지막으로 사탕도 준다. 황후의 건강을 생각하는 황제의 배려는 어쩐지 위협적이다. 나는 영화 내내 울리는 이 시계를 '아버지 시계(Father's Clock)'에 비유했다. 영문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영미권에서는 관용적으로 시계를 아버지에 비유한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감상문의 결론은 아버지 시계의 지배를 받는 궁궐은 가부장제의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고깃집에서 아빠와 싸웠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화가 나서 아빠의 도움 따위 필요 없으며 연을 끊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그동안 받은 경제적 지원들에 혼자 괜히 찔려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동안 쓴 돈은 내가 어떻게든 갚을게." 아빠는 화가 엄청 나있는 상태였지만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돈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필요한 만큼 원하는 만큼 다 가져가라고 했다. 그게 아빠의 역할이라고 했다. 나는 고마움 보다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아빠의 경제적 지원은 내게 부채였다. 아빠는 그 부채를 거둬들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부채를 언제까지고 내 어깨에 짊어 지우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너는 나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아빠가 (내가 먹기 싫을 때 조차) 내게 밥을 억지로 먹이려는 저의를 알 순 없지만, 그 순간에 나는 두려워진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밥을 먹고 있으면서 아버지의 밥을 거부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극단에 치달았던 적이 있다. 이혼 얘기가 오갔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고백했다. 당시에는 나와 동생을 두고 떠날 수 없어서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혼자서는 먹고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차마 이혼하지 못한 거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 자신의 삶을 비유했다. 소설 속 여주인공 잔느의 비극은 결국 경제력의 부재 때문이다. 엄마는 말의 말미에 나에게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조언을 남겼다.


아빠가 악의를 갖고 내게 밥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빠는 그저 사회가 부여한 아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가부장은 그에 딸린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 식솔인 내게 아빠의 역할이 무섭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아빠와의 싸움은 당일로 끝났다. 아빠는 예전과 다르게 내게 사과를 했다.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젓가락을 집어던져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다정한 아빠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후 나의 결심은 달라졌다. 나는 아빠와 싸우고 명절인데도 불구하고 집을 나와 카페를 갔다. 카페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내 몸 하나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지금의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기만의 방'이 절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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