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

기대 없는 친절에 관한 고찰

by 레드

대학원 시절 동기 중 유독 다정한 오빠가 있었는데 인기도 유독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 동기는 나를 포함해 총 6명이었는데 절반인 3명이 오빠를 좋아했다. 오빠를 좋아하게 된 동기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이해해주는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동기 오빠의 다정한 눈빛을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에 빠졌다. 분명한 사실은 동기 오빠가 객관적으로 잘생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동기 오빠를 좋아한 친구 중 하나가 이 같은 사실을 먼저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동기 3명 중 유일하게 오빠한테 고백한 사람이었다. 첫 고백이 거절당한 뒤 친구는 최선을 다해 구애의 몸짓을 했다. 그는 스스로를 ‘다정이’라는 자조 섞인 이름으로 부를 만큼 뒤에서 오빠에게 엄청 잘해줬노라고 몇년이 지난 뒤에야 털어놓았다. 그런데 다정이 사랑에 관한 단어였던가.


국어사전에 따르면 다정은 ‘정이 많음’을 의미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의 의미를 찾아보면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둘을 조합해 보면 다정이란 사랑이 많다는 의미로 의역할 수 있다. 친구는 아마 동기 오빠에게 사랑을 많이 나눠줬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다정으로 칭했을 것이다. 내 친구는 그에게 너무나 친절했던 것이다. 친절은 다정한 태도를 의미한다.


나는 어떤 세상을 꿈꾸냐는 질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한 세상을 꿈꾼다고 손쉽게 답해왔다. 당장 옆에 있는 상대방에게 친절만 해도 세상에 심각한 갈등이나 폭력은 사라질 것만 같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상대에게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친절을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풀길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들은 내 친구처럼 사랑을 갈구하며 친절을 베푼다. 그만큼 다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대학원에 이 같은 다정함을 실천하는 교수님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인간관계에서의 좌절로 인해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좌절한 상태였다. 내가 안쓰러웠는지 교수님은 나를 연구실로 불러 자신의 인간관계론을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그는 기자로 일하던 시절 타인의 부탁은 가능하면 모두 들어준다고 했다. 단 전제 조건이 있었다. 그 무엇도 기대하지 말 것.


교수님은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친절을 베풀면 언젠가 다른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친절이 돌아온다고 말씀하셨다. 대가 없는 친절이 신성한 행동이자 만물의 법칙, 우주의 진리로 느껴졌다. 지금은 안 괜찮을 수 있어도 친절을 미리 베푼다면 언젠가 내게도 기회와 같은 타인의 친절이 올 것이라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 감미로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떨떠름한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친한 동생에게 교수님의 얘기를 해주었다. 나의 감상과 함께였다. 정말 가능할까 싶으면서도 그럴듯한 믿음이다. 나도 한번 실천해 보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는 동생 주변을 서성이며 담배를 문 채 독백을 이어갔다. 동생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해. 교수님은 아내분이 계시잖아.”


그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는 아무런 기대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교수님이 아무런 기대 없이 친절을 베풀 수 있던 이유는 그에게 같은 행동을 해주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동반자, 내 편, 내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정한 존재를 이미 교수님은 갖고 있던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인생의 내 편을 만들고 싶었다.


어느날 낯선 사람이 내게 이상형을 물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좋다고 했다. 그랬더니 다정한 사람이란 뭐냐고 낯선 이가 되물었다.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다정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다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고 되는대로 말했다. 말을 마친 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 낯선 사람이 다정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했다. 나는 항상 그렇듯 친절하게 그러겠다고 답했다. 기대를 품은 채 다정한 마음에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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