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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Sep 09. 2023

눈 내리는 날에도 낭만은 없다

눈 내리면 비상근무

  밤중에도 넉가래로 눈을 밀고 염화칼슘 포대를 어깨에 짊어져야 한다. 유독 이곳은 비탈이 많고 경사 또한 심해 차가 미끄러지는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입주민이나 입주자 대표까지 나서 눈 치움을 재촉해 관리사무소 직원이나 초소 보안대원들은 낯이건 한밤중 가리지 않고 현장에 투입된다.

 적막이 흐르는 밤, 바람은 칼끝 같이 예리해 옷 속을 파고든다. 장갑을 끼었어도 손끝이 아려 입김을 호호 불면서 염화칼슘을 삽으로 떠 훠이 훠이 뿌린다. 뿌릴 양이 충분하지 않으면, 그 무거운 포대를 나르는 일 또한 고역이다. 20Kg의 무게에 눌리면 어깨가 뻐근하다. 그래서 꾀를 낸 게 어깨에 짊어지는 대신 유모차를 이용하기도 한다.

 나이 든 어르신들이 산책을 하거나 볼일을 보려고 끌고 다니는 줄만 알았던 유모차가 한겨울 무거운 짐을 이동하는 손수레 역할을 한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유모차는 유모차일 뿐이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이동 수단이 되고 작업 도구가 된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고생이 말도 못 했을 것 같다. 부피가 큰 리어카보다 다루기 쉬어 좋다. 눈 내리는 날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유모차의 고마움을 떠올린다.



 내가 일하는 아파트는 단지가 넓어 초소 두 개를 두어 운영 관리한다. 코로나19 전염병이 창궐하며 나는 후문에서 정문으로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선 또다시 후문에 배치되었다. 코로나19에 전염되어 일하지 못하게 되면 그 자리를 메워야 하는데, 12월 한 달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자리를 옮겨 다녀야 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에.

 후문 초소엔 천이 해지고 달아 너덜너덜한 유모차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정문 초소엔 그마저도 없다. 나는 외곽 근무 틈틈이 분리수거장을 돌아다녔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105동 분리 수거장에서 입주민이 사용하다 내다 놓은 유모차를 발견했다. 요모조모 살피니 후문에 있는 것보다 상태가 좋아 그곳에 있는 것과 바꿀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 먹고 정문 초소에 끌어다 주고는 언제가 쓸모가 있을 테니 그 대가로 커피 한 잔과 바꾸자고 했다.


 K대원은 내가 입사한 후 열흘 조금 넘은 뒤에 들어왔다. 입사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근무 첫날부터 오지게 눈이 쏟아졌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대원들이 본래 맡겨진 업무인 차량 통제, 주차 질서, 교통 안내 등의 일은 제쳐 놓고 비상근무에 들어갔던 날이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눈 밭, 아파트 단지가 축구장 10개를 합쳐놓을 만큼 넓다 보니 내리는 눈이 반가울 리 없다. 낙엽이 길바닥에 수북이 쌓이면 바람을 불어 쓸어내는 낙엽송풍기를 이용해 수북이 쌓인 눈을 쓸어내도 줄기차게 내리는 눈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다. 사람 발자국이 있는 길은 바닥에 눈이 달라붙어 몇 곱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그런 데는 빗자루가 소용이 없다. 수시로 눈이 내리는 날엔 눈을 치운 지 한 시간 정도 지나 다시 넉가래를 들고 나와야 한다.

 하도 눈이 많이 내려 기억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12월 13일. 그날 밤 보안실장에게서 카톡으로 업무 지시가 내려왔다. 그 시각은 새벽 1시경쯤이다. 109동 근처 초등학교로 향하는 길에 눈이 내려 쌓이면 다음 날 학생들의 미끄럼 사고가 염려되니 사전에 염화칼슘을 뿌려 놓으라고.

 그곳은 내 근무 구역이 아니었지만 근무 첫날부터 K대원은 작은 체구로 그 무거운 염화칼슘 포대를 짊어져야 했다. 초소에서 그곳까지의 거리가 멀고도 멀지만 다른 어느 해 겨울보다도 적설량이 많아 적재함에 준비해 둔 염화칼슘이 동이 났나 보다. 그 바람에 먼 곳 염화칼륨 저장소까지 가 메고 왔으니 신세가 어찌 고달프지 않으랴.


어깨에 염화칼슘 포대를 둘러메고 한 손에는 삽을 부여잡고 뒤뚱뒤뚱 힘겹게 걷는 모습을 생각하니 동정심이 일었다.


하긴 내 코도 석 자라 남 걱정 할 때가 아니었다. 나나 또 다른  대원들은 그날 각자 맡은 근무 구역에서 똑같은 일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듯 눈이 많이 쌓이는 날엔 밤잠을 설쳐가며 제설 작업을 각오해야 한다. 단지가 넓어 조감도에 일할 구역을 지정해 뒀다. 눈 치우는 구역과 염화칼슘을 보관해 놓은 적재함 장소까지 표시해 뒀다. 그러니 누가 시키던 시키지 않던 눈이 쌓이면 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눈을 쓸고 손수레 대신 유모차를 끌고 넉가래로 쌓인 눈을 밀어내야 한다. 눈이 녹아 길이 얼음판으로 변하면 한밤중이라도 비탈길을 오르는 차량들이 헛바퀴질을 해 뒤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할까 봐 비상이다.



 외곽 도로나 고속도로, 하다 못해 시내 한 복판에서 날만한 빙판길 차량사고가 아파트 단지에서도 번번이 일어난다. 한 마디로 단지 면적이 무척 넓다는 이야기다. 초저녁 오후 7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직장인들이 일을 마치고 귀가 차량이 몰리던 시각, 지하 주차장이나 경사로를 오르는 차량들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대원들은 차량 안내와 통제를 한다. 그렇게 힘썼는데도 차량 미끄러짐 사고가 2건이나 일어났다.

 정문 초소에 진입해 지하주치장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꼬리 물기를 하거나 앞 차와의 간격을 유지하지 않으면 경광봉으로 멈춤 지시를 한다. 앞 차량이 지하 경사로를 다 내려가는 것을 보고 뒷 차를 내려보내는데 그런 통제를 했어도 앞 차를 들이박는 사고가 일어났다. 또 다른 사고는 대낮에 지하차도 경사로를 내려가던 차량이 속도를 이기지 못해 다른 차량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방향을 틀다 벽체를 들이박고 말았다.

 눈 내리는 날에도 낭만은 없다. 감성도 접어야 한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눈길을 걸으며 옛 애인을 생각하거나, 달달했던 낭만과 추억을 더듬을 겨를의 시간도 없다. 그런 날엔 빗자루를 들어야 한다. 유모차에 염화칼슘 포대를 넉넉히 실어야 한다.

 눈이 한밤중에도 내리는 날엔 초소 유리창에 제설 작업 중이라는 표식을 걸어두고는 눈을 쓸고 마음을 쓸어야 한다. 고향 눈 덮인 언덕이나 초가집 화로에서 익어가는 군고마를  떠올리는 대신 어느 곳이 미끄러울까 염려하며 그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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