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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Sep 09. 2023

내 이름을 말한다

부제: 수풀(林)에 맺힌 옹골찬 열매의 결실을 꿈꾸며

 

     

     

   ‘林炯默’. 가만히 뜯어보면 매력 있고 빛나는 이름이다. 남자의 성품인 묵직함이 느껴져 행동이 가볍지 않으며 조용히 빛을 내니 신중하며 겸손하다. 작명가(作名家)는 아니지만 늘 그렇게 이름을 풀이해 왔다. 성공과 출세가 이름 속에 들어 있기에 넉넉하지 않아도 배고파하지 않았다. 아픔이 다가와도 참아냈다. 거친 풍파와 세찬 바람이 다가오면 거쳐 가는 과정이라 여겼고, 내가 끌어안고 가야 할 운명이라며 거부하지 않았다. 먼 훗날 옹골찬 열매의 결실을 꿈꾸며 세상과 타협해 왔다.


  나무가 나이테를 늘려갈수록 사람 눈에 띌까 하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듯 내 이름 석 자에도 남모르는 외로움이 들어 있다.


炯 - 빛이 나면 날수록 외롭고, 默 - 잠잠하니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 우리 눈에 익숙한 오동나무 동(桐)과 동굴 동(洞)자를 보자. 모두 한일(一)변이 들어 있다. 사람인(人), 입구(口), 흙토(土), 계집녀(女) 변(邊)을 붙여 쓰는 갖가지 ‘동’에도. 하다못해 풀(艹), 돌(石), 개(犬), 말(馬)까지 한일(一)을 품고 사는데, 내 이름 炯에는 없다. 그렇다. 성(姓)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름 두 자에도 외로움이 겹쳐 있다. 默자야 부안 임가(父安 林家)의 돌림 자(子)라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해도 ‘炯’은 달리할 수도 있지 않은가.


  고독의 켜가 너무 두껍다. ‘혼자뿐이잖아!’ 그런 기분을 떨쳐내지 못해 왔다. 아무리 가난해도 제복은 갖고 태어난다 하여 어느 집이건 자식을 많이 두었는데 우리 집은 조용했다. 물론 내 밑으로 여동생이 셋이 있기는 하지만 시집가면 그만이기에 집안일은 모두 내 차지가 됨을 말함이다. 초등학교 때에도 친구들이 별로 없어 동네 형들과 어울리며 놀았고, 그나마 있던 친구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갈 고향엔 아무도 없다.


  그런 외로움은 할아버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아버지는 4형제의 맏이로 산을 개간하고 어우리 소를 주며 형제들까지 돌봐야 했다. 집에서 50여 리가 넘는 음성 장까지 마차를 모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남들은 한 번 갈까 말까 한 장을 하루에도 두 번씩 오가며 억척같이 돈을 모으셨는데 하늘도 무심하지, 그러한 노력도 6.25 난리가 나자 허사가 되고 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아들까지 잃으신다. 화병이 들고 허망한 마음을 달래지 못한 할아버지는 회갑이 드는 해에 그만 아버지 한 분만 남겨두시고 세상을 떠나신다. 아버지마저 내가 6살 되던 해에 남동생 하나 있는 것 흙으로 돌려보낸다. 모진 바람이다. 나 또한 아들 하나 두고 있으니 그 바람을 어디에서부터 막아야 할까. 어깨에 또다시 바람이 든다.     


  고독을 뱉어내는 절규가 무섭다. 고독은 눈물이다. 입김을 불어넣고 따스하게 방바닥을 데워놓아도 고독은 쉬 가라앉지 않는다.


 릴케는 ‘고독’이라는 시(詩)에서 고독은 비와 같다고 했다. 모든 골목들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몸뚱어리들이 실망과 슬픔에 서로 놓아주거나,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침대에서 자야 할 때 동틀 녘에 고독은 비가 되어 내린다고 했다.


 낭만과 그리움이 스며있는 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으면 얼른 발길을 돌려야 한다. 철썩거리는 파도, 돛단배, 등대, 갈매기는 고독을 가진 이름이다. 불빛이 없는 도시의 거리, 밤하늘의 별, 전봇대에 걸려 있는 까치,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 풍경소리만 댕그랑거리는 늦은 오후의 산사(山寺), 그 어느 하나라도 팔짱을 끼어 줄 연인이 옆에 있어야 고독의 이름에서 벗어난다.


  드문 이름을 가진 나. 얼마나 이름이 귀하면 빨빨거리는 청년기를 지나 쉰으로 올라선 지금까지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대학교 다닐 때 한 친구는 시내버스 안에서 나와 외모가 아주 비슷한 사람에게 알은체했다가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단다. 서울 동생 집에 들렀을 때에도 거실 응접탁자 위에 놓인 전화번호 책을 먼저 집어 들었었다. 이름에 대한 목마름이 발동했던 것이다. 깨 한 말만 둘러멜 힘만 있어도 사람 꼬여 드는 데가 서울이다 보니 영자, 순자, 철수, 영수라는 이름만 넘쳐난다. 인터넷 검색 창에서 검색을 하면 더러 같은 이름이 올라오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어디에서라도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호기심을 드러낸다. 차창으로 비친 이정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동네나 면(面) 이름이 같으면 형제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만난 사람 중에 유일한 ‘최형묵(崔亨默)’이라는 초등학교 후배도 한자(漢字)는 다르게 쓴다. 고향을 떠나 청주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데 10여 년 전쯤 납품관계로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났었다. 지금은 가끔가다 상가(喪家)에서 대면한다. 지금은 별이 된, ‘형묵’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한 사람. 나와는 신분이 너무 달라 만날 수 없었던 또 다른 남자, 연형묵(延亨默)이 있다. 남한에 강영훈(姜英勳)이 있다면 북한에는 그가 있다. 1931년에 태어나 채코에서 유학을 하기도 한 조선노동당 비서로서 한국 측의 강영훈 총리와 같이 남ㆍ북 고위급 회담을 이끈 장본인이다.


  청주교육청에서 근무할 때였다. 관리과에서 3년간 꼬박 유치원 업무를 보다 근무기한이 만료되어 1990년 8월 1일부터 학원 설립과 지도ㆍ감독을 하는 교육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 부서에도 ‘영훈’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었다. 강영훈과 연형묵이 남ㆍ북의 장애물을 걷어내고 있다면, 교육청에서는 ‘임형묵’과 ‘원영훈’이 나란히 앉아 학원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남ㆍ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다 보니 덩달아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직원들은 우리가 출근하기만 하면 왜 여기는 회담을 안 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름이 흔하지 않아 외로움에 떨던 나는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서 또 하나의 이름을 짓고 산다.


 ‘원당(元堂)


 본 이름보다는 필명이 부르기도 쉽단다. 동녘에서 아기 울음을 터트린 동네. 어린 시절의 꿈을 안고 희망을 일구던 초등학교가 있고, 내가 청년으로 커가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공간.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나 그 품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리워하는 나의 고향. 우리 가족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어렵더라도 바른길을 가라고 일깨워 주는 터전. 오늘 가고 내일이 와도 기본을 중시하고 기본을 놓치지 않는 으뜸의 철학을 실천하려고 ‘원당’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세상을 살며 글을 쓴다.


  가끔가다 사람들이 내게 이름을 물어올 때가 있다. 한결같이 형(炯)을 동(烔)자라고 알고 있다. 烔을 아니 쓰고 炯이라 작명한 것은 과욕을 부리면 도리어 화근(禍根)이 되거나 화(火)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염려다.


 (『수필문학』2008. 8월호 기획 연재 - 내 이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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