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봄이지만 여름의 날씨를 보인다. 밖에서 근무를 마치고 들어오는 대원의 얼굴이 벌겋다. 땀이 나는지 이맛전을 손으로 문지르고 정수기에서 시원한 냉수 한 잔 뽑아 든다.
겨울 지나 봄이 온 것 같은데 어느새 바깥 기온이 섭씨 25도를 오르내린다.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에 땅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그런 상태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나면 또 다른 업무가 이어진다. 화재경보음이 울리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민원이 발생하면 현장으로 내달려야 한다. 주말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날엔 더 고역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몸을 씻을 수도 없다. 세면장엔 물통과 물바가지 하나 걸려 있어 급한 대로 물 받아 끼얹어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휴게소에 설치된 변기는 막혀 오줌조차 배수되지 않는다. 말이 휴게소지 대원들은 볼일을 보려면 그 멀리 입주민들의 공동 화장실까지 가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관리사무소에 수선 요청했다고 하나 날이 풀려야 고쳐 준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그렇게 휴게소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해 불편을 겪는 나날 속에 몇 달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휴게소 화장실이 말끔해졌다. 어쩐 일인가 싶었다. 봄의 계절이 와 고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하 순찰 중 휴게소에 들러 소변을 보고 잠깐 쉬고 있는데 미화원 한 분이 나처럼 급한 볼일이 있다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분하고는 근무 중 마주칠 때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1톤짜리 마대 자루에 종이박스가 가득 차면 끌어낼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데, 그때마다 힘을 합해 일을 도와줄 정도로 친한 사이다. 그날도 자기 속사정을 얘기하며 화장실 수선 내용에 대해 비밀 아닌 비밀 을 풀어놓는다.
입주자 대표회장이 미화원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싶은지 자리를 마련하고 몇몇을 불러놓고 묻더란다. 일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고충이 있으면 말하라고. 그때 그가 손을 번쩍 들고 초소 화장실 사용 불편을 얘기했다고 한다. 미화원들 휴게소는 따로 있는데 작업하다 급한 볼일이 있으면 그곳 초소까지 가기가 멀어 상가 공중 화장실을 이용한 거며, 임시방편으로 보안대원 초소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그마저도 변기가 막혀 사용할 수 없다고. 바른말하면 관리소 직원 눈에 나 잘릴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먹혀들었는지 그다음 날 입주자대표회장이 관리소 직원 및 미화원을 동행하고 현장 확인을 하더니만 바로 고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말하기 무섭게 고쳐놓더란다. 화장실이 막혀 겨우 내내, 아니, 봄이 왔는데도 고치지 않다가 입주자 대표회장 말 한마디에 고쳐 놓다니.
그렇다. 보안대원들이 근무하거나 휴게 할 때 애로가 있더라도 관리사무소나 용역업체에 얘기해 봤자 들어주지 않으니 아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변기가 막혀 불편을 겪어도 나 몰라라 하는데 사소한 것 부탁하면 아예 무시해 버리기 일쑤다. 그러니까 대원들은 초소나 휴게소에 필요하다 싶으면 주민들이 사용하다 분리수거장에 버린 것 중에 골라서 쓰거나 필요한 것은 손수 사서 쓰고 있다.
그런 형편이니 휴게소에 샤워기를 달아달라고 하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할 것 같아 아예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차라리 내 돈을 들여 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건비 포함 10만 원 정도 쓸 것을 각오하고. 처음에는 같이 근무하는 대원들에게 그 경비를 공동 부담시킬까 싶었지만 의견이 분분할 것 같아 소리 내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 스스로 하겠다고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그러고는 며칠 지나 부품을 사서 직접 설치할까 했지만 손재주가 메주인 데다 초소엔 어떤 연장도 비치된 게 없어 설비업체에 부탁해 샤워기를 달기로 했다. 생각이 통했던지 마침 oo설비 글씨가 새겨진 차량이 초소 앞을 지나가는 게 아닌가.
대개 사업하는 분들은 차량에 사업체 전화번호나 개인 휴대폰 번호를 새겨 놓는다. 얼른 볼펜을 꺼내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사업이 바쁜 날 아니면 106동 지상 주차장에 늘 설비 차량을 받쳐 두는 것을 CCTV 화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점심 먹고 나서 편안한 시간에 나는 업체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하고 휴게소에 샤워기를 달아 주는 일도 하시냐고 물었다. 돈도 되지 않는 사소한 일이라 들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흔쾌히 수락하는 게 아닌가. 시간 나면 내가 근무하는 초소에 들르겠다며.
한데 그분도 사업 상 바빠 그런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 또한 격일제 근무라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가끔가다 휴게소 앞을 들락거리는 것을 보아도 그분 사정이 있겠지 하여 재차 전화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입주민 출근 시간에 맞춰 교통안내를 하고 있는데 마침 oo설비 차량이 2게이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인사를 나누고 시간 내 초소에 들러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분이 초소 앞을 지날 때면 목례를 나누기까지 할 정도로 친분을 쌓았으니 그분도 나를 아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설비업체 대표가 며칠 뒤 초소에 들러 수도전을 살피고 어떤 샤워기를 달까 살펴보고는 돌아갔다. 그러고는 일이 없는 일요일 아침, 내 근무 시간에 맞춰 그가 나를 찾아왔다. 샤워기를 달러 온 그 분과 아파트 관련 얘기며, 주차장 부족 문제며, 대원들의 불편을 얘기했다.
샤워기가 규격품이 아니어서 장착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다 수도전과 샤워기 이음새에 패킹이 맞지 않아 그 틈새로 물이 졸졸 새 나왔다. 중국 산을 샀는데, 그건 버리고 국산 제품으로 바꿔 달겠다며 초소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지상 순찰 업무 시간 중이어서 그 과정을 계속 지켜볼 수 없었던 나는 근무를 나갔고, 근무를 마치고 초소에 오자 동료 대원이 샤워기를 잘 달아놓았다고 상황을 전달한다.
휴게소에 단 샤워기 상태를 확인하고는 부품비와 출장비를 합쳐 얼마를 드리느냐고 물었다. 휴대폰에 계좌번호를 문자로 남겨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그분은 그냥 해주겠다고 한다. 돈 안 받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경비원들이 입주민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수고비를 받느냐고. 인건비는 빼더라도 부품 값을 받으셔야 한다고 되묻자, 무슨 소리냐고 하며 내가 봉사했다 치고 샤워기를 달아 드린 거라며 전화를 끊는 게 아닌가.적게는 5만 원에서 많게는 7-8만 원은 드려야 하거늘. 더군다나 일요일 날 쉬지 못하고 시간을 내셨는데.
설치비를 요구하지 않은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더 감사한 것은 경비원들의 노고를 알아준 데 있다. 힘들고 고된 일을 하면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경비원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 바다와도 같다.
이런 분들이 있어 일할 맛 난다. 세상인심 메마르다지만 사람들 모르게 숨은 곳에서 좋은 일 하는 분들이 있어서. 최근엔 통닭집에서 통닭 한 마리를 튀겨 갖고 오길래 물었더니, 얼굴 알지도 못하는 입주민이 경비원들 고생한다며 통닭에 소주 한잔 하다 생각나 전하는 거라기에 그날도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