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진다. 비는 쉬는 시간도 없나, 길도 논밭도 물바다, 줄기차게 쏟아붓는다. 저지대에선 물이 찼다고 야단이다. 축대가 무너지고 농작물이 물에 잠기고 강둑이 무너져 오송 지하 차도가 물에 잠겼다고 구원을 요청한다. 충주에서 과수 농사를 하는 친구도 산사태가 났다며 울상이다.
장마가 시작돼도 하루 건너 만큼, 어떨 때는 몇 시간씩 내리다 그치곤 하는데, 이번 비는 어찌 된 일인지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해 오늘 이 시각에도 그칠 줄 모른다. 무심천 물도 불어 다리 밑을 넘보는가 하면 미호강도 일부가 범람했다는 뉴스가 뜬다.
오늘 나는 평시 출근 시간보다 10여 분 일찍 집에서 나왔다. 도로가 미끄러울 수도 있고, 비에 의한 변수로 도로에도 사정이 있을까 봐. 아니나 다를까. 테크노폴리스아파트 단지를 지나 문암생태공원 인근 철도가 지나가는 다리 밑에 닿으니 차량들이 비상 경고등을 켠 채 멈춰 서 있다. 그동안의 경험치도 있고 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시각이 06시 20분경, 차량이 막힐 시간이 아님에도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뭔가 도로에 사정이 있다는 증거다. 이곳은 내리막길인 데다 급 커브에 지대가 낮아 눈이 내리면 사고가 종종 나던 곳이기에 비로 인한 물 잠김이 있을 게 분명해 차를 돌려 다른 도로를 통해 출근했다.
아니나 다를까. 출근하고 같이 일하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곳의 사정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LG로를 지나 문암생태공원으로 접어드는 갈래길이 있는데, 그 길을 내려오다 보면 생태공원이 있고 공원을 거의 벗어날 즈음 충북선 열차가 지나가는 철로가 나온다. 이 철로를 지탱하는 다리 밑이 저지대라 어제부터 빗물에 잠겨 경찰관들이 나와 진입 통제를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맛비로 인한 통행불편 및 안전사고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하거늘, 그 어떤 조치도 없다. 폭우가 쏟아지면 길 막힘을 예상해 도로 진입 금지 팻말을 세우거나 바리케이드를 쳐 차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함에도 그냥 내버려 두어 그곳을 지나가는 차량들만 고충과 불편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다행히 그곳 지리 사정을 알아 일찌감치 차를 돌려 송절동 테크노폴리스 아파트 단지 중심 도로를 통해 출근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운전자라면 마냥 그곳에서 시간만 축내고 있었을 것이다.
주인 잃은 핸드폰도 문암생태공원에서 영문을 모른 채 서 있던 차량들 마냥 밤새도록 초소 대원들과 보초를 서며 주인을 기다렸던 것이다. 도로가 물에 잠기건 말건 대책을 세우지 않아 그 사정을 모르고 진입했던 차량처럼, 평시처럼 무심하게 차를 몰고 그 길을 가다 물에 차가 잠기는 바람에 차는 내버려 둔 채 위험을 무릅쓰고 몸만 빠져나온 운전자처럼 핸드폰도 그 어떤 구원의 손길이 없어 밤새도록 주인의 품을 그리워했던 거다.
자꾸 핸드폰에 눈길이 간다.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처럼 핸드폰이 애처로워 보인다. 내 손에서 발하는 열기라도 느끼게 하고 싶어 핸드폰을 집어 든다. 나의 관심이 텔레파시를 통해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화면을 여기저기 터치해 본다. 다행히 사진 하나가 뜬다. 어린 여학생이다.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으로 밝게 웃고 있다. 핸드폰 뒷 판 덮개에도 고리 장식이며 스티커가 이것저것 붙어 있는데 그 여학생의 손길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정보를 찾을 수 없다. 비밀 잠금장치를 해 놓아 접근할 수 없다. Pin번호를 입력해야 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는 화면만 뜬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오래 보아야 보인다. 문득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구가 떠오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핸드폰도 그렇다.
여기저기 눌러보고 요모조모 살핀다. 그렇게 화면에 손길을 주니 핸드폰 화면 아래에 전화번호가 뜬다. 이것이 실마리가 될까 하여 전화번호를 옮겨 적고는 핸드폰 뒷면도 주인임을 표시하는 또 다른 단서가 있을까 하여 세세히 들여다본다.
관리사무소에 정보 요청을 하니 핸드폰 번호가 조회되지 않는다고 한다. 더 이상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핸드폰 화면을 위아래로 밀었다 올렸다 하자 우연히 알림판이 나타난다. 알림판에는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되면 그 흔적이 남는데, 그런 기록들이 보인다. 거기에는 핸드폰을 찾는 가족들의 바람이 가득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게 하루 전인데 어디에서 보관하고 있나 확인한 전화가 11번이나 된다는 표시가 있다. 외할머니 외 10건. 마지막 확인 전화가 오늘 아침 시각 08시 45분이다.
혹시나 해서 핸드폰 화면에 표시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내가 전화를 걸어 주인을 찾는데 실마리가 되었으면 하고. 전화를 거니 신호는 가는데 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진동도 아닌 무음 상태였다.
그리하고 나서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알림판을 확인하니 내 핸드폰 번호가 등장하며 주인을 찾는 번호가 12번째임을 알린다. 또한 핸드폰 고객센터 번호가 뜨고 위치 추적에 관한 안내문이 올라와 있다. 이제 됐다 싶었다. 알림판에 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핸드폰 보관 장소와 화면에 적힌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다.
분실 신고 안내 도우미와 통화하고 나서 한 시간여쯤 지났을까.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근무처로 다가선다. 얼굴을 보니 핸드폰 화면 속의 여학생이다.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핸드폰 관련 신상에 대해 몇 가지 물으니 주인임에 틀림없어 핸드폰을 아이의 손에 들려준다.
날마다 새로운 일이 벌어지지만 특별한 게 없어 무료한 나날의 연속이다. 하여 나는 어느 날부터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렇고 그런 날의 연속이지만 내 나름대로 재미 붙일 것을 만든다면 시간도 잘 가고 무료함도 덜 것 같아 일부러 사건을 만들곤 한다.
하루 전에는 방문객 차량이 대원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단지 내로 무단 진입했다는 메시지를 남겨 그 차의 진입 방향을 알려 달라 하고는 지시 위반에 대한 벌칙으로 차량을 찾아 스티커를 붙일 요량으로 주차장을 뒤졌다. 오늘은 주인 잃은 핸드폰이 하루가 지나도록 방치되어 있어 어떻게 해서라도 주인을 찾아보자는 결심 하에 일을 벌인(?) 것인데 일을 벌이길 잘했다.
이런 일이 있어 하루가 즐겁다. 보람이 있다. 다음 출근 날에는 또 어떤 일을 저지를까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전 핸드폰을 찾아간 아이가 창문을 두드리며 손을 내민다. 아이 아빠가 사 비닐봉지에 넣어 준 Take out 커피가 아이 손에 들려 있었다.
커피가 참 달다. 그 어느 날 먹었던 커피보다도 달다. 비가 억수로 퍼부어 뒤숭숭했던 기분을 싹 가시게 한다. 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그 소감을 이렇게 적고 있는데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아이가 쓴 일기장의 내용이 무척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