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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Sep 15. 2023

얼음골 탑

얼음골에 그가 있다. 얼음이 되어 서 있다. 비록 그의 몸은 얼음이 되었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려고 제 몸 풀어내고 있다. 얼은 몸 녹으면 천상(天上)에 다시 물을 길어 올려 밤새도록 몸집 불리고는 허허롭게 몸을 내주고 있다.

108배를 드리는 심경으로로 계단 길을 오른다. 계단을 넘어 비탈을 오르면 평길인가 싶더니 금세 오르막이다. 인생 여정이 그러하듯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기 만만치 않다. 그렇게 십여 분 조금 넘게 걸었을까. 호흡이 거칠어지고 숨이 차 온다. 배낭에 넣어 가지고 온 물병이 생각날 정도로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벌써 산은 푸른빛이 돌고 연록의 물결이 일렁인다. 등산로에도 봄볕을 머금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을 보면 계절의 변화가 감지된다.

상당산성에 가려면 청주 시내 이곳저곳에서 자동차로 삼사십 분이면 충분하다. 어린이공원이나 명암 약수터, 또는 것대산 줄기 타고 걸어 올라도 한두 시간 안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던 매월당 김시습은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을 따 무는 모습을 보고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유산성(遊山城)이라는 시(詩)를 남겼고, 산성 정문 격인 공남문(控南門) 주변에 단풍이 물들면 경치가 절정에 이르는데, 이맘때면 주차 공간이 부족할 정도여서 청주에서는 명소 중의 명소로 꼽힌다. 또한, 비탈이 많지도 않거니와 경사도 심하지 않아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돌 수 있고, 청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조망마저 좋아 나 또한 자주 찾는다.

  고갯마루에 닿자 벤치에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다. 등짐을 넉넉하게 짊어지고도 남을만한 어깨를 가진 그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 쉽지 않은 듯 머리카락엔 새치가 듬성듬성 보인다. 하염없이 어디엔가 시선을 주고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에서 덕지덕지 묻어나는 외로움을 읽는다.

  걷다 보면 정자(亭子)가 나오고 옹달샘에서 물 한 모금 축이고 나서 우암산 줄기 따라 오르다 보면, 거의 다가 산성과 맞닿을 즈음에 돌탑 하나 있다. 작다면 작다고 여길지 몰라도, 어떤 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발걸음이 멎는다. 탑은 탑이지만 탑이 아니요, 얼음덩어리지만 얼음이 아니다. 어떤 이의 심장이요, 숨 쉬는 작은 우주 같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크고 작은 탑들이 많다. 웅장한 사찰부터 도심을 벗어난 숲과 산, 그리고 빌딩이 들어선 거리 한복판에도 모양과 크기를 달리하며 대중들과 호흡하고 있다. 발걸음 하다 다칠 것을 염려해 적당한 곳에 돌을 모으다 보니 탑이 된 것이 있고, 괴로운 마음을 씻어내고자 신성시하는 마음으로 쌓은 것도 있을 것이다. 공을 세운 사람들의 넋을 기리거나, 액(厄)을 물리고 우주의 기운을 얻기도 하지만, 이곳 돌탑은 그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산을 찾는 이가 주변의 돌을 하나둘 주워 올리고 올려 탑이 된 것은 맞지만, 다른 지역 여느 것과 사연이 달라 심금을 울린다.

  산을 좋아하고 산객을 사랑한 그는 차림새마저 보잘것없이 홀로 지냈건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그는 산성에 오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빙과류를 파는 사람이었다. 무상으로 장사할 수 있는 터를 얻은 미안한 마음에 산에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뭘 할까 고민하다 빙과류와 함께 지게에 얼음덩어리를 같이 메고 왔다. 그러고는 탑이 있는 그 자리에 얼음을 떼어 놓고는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 원 한 푼 받지 않고 무상으로 제공했다. 산에 오르다 막바지에 다다르면 숨이 차고 다리도 뻐근한데 잠시 땀 식히는 시간을 갖게 했다.


[사진출처] 다음 블로그 Bsccus English Class


  어떤 날은 얼음이 반 이상 남아 있고, 또 어느 날은 거의 없어진 날도 있었다. 그 광경을 처음 보고 나서는 그 자리에 얼음이 놓인 것이 이상했고, 누가 얼음을 그곳에 가져다 놓았는지 의아했다. 놓인 얼음을 그냥 가져가도 되는지, 얼마의 돈을 놓아야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지만 그런 궁금증은 얼음 녹듯 풀렸다. 그의 손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방송을 타면서 선행이 알려졌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뜻하지 않게 그는 오토바이에 얼음을 싣고 오다 그만 오토바이에 눌리고 말았다. 그날도 소몰이꾼이나 장사꾼들이 옛길을 넘듯 산성 고개를 넘어 산객들에게 얼음을 나눠주려 했는데 채 육십여 년도 살지 못하고 떠나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아니, 얼음이 놓였던 자리에 얼음이 놓이지 않은 연유를 안 사람들은 얼음이 놓였던 그 자리에 국화며 야생화를 가져다 놓았다. 어떤 이는 빙과 하나 놓고는 저승에서라도 고단한 삶 살지 말라고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그런 시간 속에 산객들 하나둘 등산로 주변 여기저기 흩어진 돌을 주워 모아 탑을 쌓았고,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이곳을 얼음골로 명명(命名)했다. 얼음골에 얼음은 없어도 얼음덩어리가 승화하여 지금의 탑이 된 것이다.


 상당산성에 오는 사람들은 대게 정문 격인 공남문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문과 동문을 산책로 삼아 구경하고 떠난다. 어린이공원에서 산성 길을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도 돌탑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여느 산에 있는 수많은 탑 중에 하나라고 여겨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의 마음은 사뭇 다르다.

  그는 얼음이 되었어도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차가운 몸이 되었어도 차갑지 않고, 그가 남긴 온기 뜨거워 쉬 식지 않았다. 비록 그는 몸을 뉘었어도 사람들을 일어서게 했다. 얼음골에 바람이 들어도 그의 입김에 가슴 뛰게 했다. 어느 때는 연녹색으로 물들다가 또 어느 날에는 붉게 타오르며 사람들의 가슴을 데우고, 서설(瑞雪)이 세상을 덮는 날엔 순백의 지성으로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산사(山寺)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가 이 땅에서 잠자는 생명을 깨우듯, 돌탑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울림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수풀 저 멀리에 둥지를 틀던 산새가 이곳까지 날아와 적적한 기분을 달래려 지즐대는 날엔 “아이스께끼~ 아이스께끼~”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가 있던 산성 쪽을 올려다본다.

  배낭에 넣어 온 캐러멜을 꺼내 입에 오물거리다 커피 한 잔 따라 낸다. 이참에 돌 하나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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