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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Sep 20. 2023

복숭아가 익어가는 계절이면   

아버지의 영토


 들판을 떠돌던 바람이 매봉재 골짜기로 숨어든다. 백족산은 북서풍을 다 막아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바람이 상처 내고 간 자리마다 복숭아 묘목을 심으셨다. 그러기를 몇 해, 과수원은 조생종인 창방부터 당도가 높고 향이 가득한 미백과 백도, 천중도, 엘바도까지 복숭아 전시장을 방불케 다.  

 복숭아과수원은 원래 목화를 기르고 계절에 맞춰 감자와 고구마를 재배하던 땅이었다. 깨와 콩을 심고 배추를 갈아먹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난데없이 사과나무 묘목을 심다. 그렇게 보무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금세 만석꾼이라도 된 것처럼 만면에 웃음을 지으셨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열과 성을 다해 키운 나무는 보답이라도 하듯 3~4년 만에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뜨거운 땡볕을 견뎌내고 모진 추위를 이겨낸 결실이기에 가족들은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인도’, ‘국광’, ‘홍옥’이 맺혀 있었다. 과즙이 풍부하고 당도가 높은 ‘부사’ 같은 품종은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속아서 묘목을 사셨던 거다. 농사꾼은 씨앗을 뿌리지만 자기 마음대로 열매를 맺게 하지 못한다. 콩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심을 수 없는 자갈밭을 가진 주인처럼 아버지는 여러 날 한숨만 쉬셨다.  

 사과는 상품 가치가 없어 내다 팔 수 없었다. 나는 이런저런 고민 끝에 사과나무를 베어내기로 작정했다. 욕을 먹어도 내가 먹고 야단을 맞아도 내가 맞는다는 각오였다. 아버지는 군대에 가야 하는 나보다 쓰러진 나무가 애처로워 부둥켜안을지 모르지만, 난 힘들게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과수원 일에서 얼른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나무가 쓰러질 때마다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과수원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곡식을 심어 먹는 밭으로 되돌아갔다. 구름이 수를 놓고 새떼가 날아들었다. 그러더니 어느 해부터인가 장호원과 감곡 지역을 중심으로 복숭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돈이 된다니까 골짜기 밭이건 평지를 가리지 않고 너도나도 복숭아나무를 심다. 사람들 모두 ‘햇사레’를 꿈꿨다. 아버지 또한, 달콤한 유혹을 마다하지 않으실 분이다. 사과농사 실패에 대한 아픔을 딛고 이번만큼은 제대로 돈도 벌고 멋진 농군 소리를 들으려 하셨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사과나무를 가꿀 때보다 더한 열정을 보이셨다. 봄이 오기 전부터 웃자란 복숭아 가지를 잘라내고 밑거름을 하는가 하면 틈을 내어 과수재배에 관한 책을 읽고 기술자를 만나셨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바쁜데 열매를 솎거나 봉지 씌우는 일손이 모자라면 타 동네까지 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다.

 땀 흘린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돌아오는 대가는 너무나 미미했다. 복숭아과수원이 평지이다 보니 냉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한두 가지 품종을 집중적으로 심은 것도 아니고, 복숭아 수확 시기도 제각각이다 보니 품은 품대로 들고 목돈을 쥐기 어렵다.  운도 없게 시리 농사가 잘되었다 싶으면 태풍이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다 된 밥에 재 뿌린다고 잘 익은 복숭아를 땅바닥에 수북하게 깔아놓고, 가지를 부러트리고, 나무를 병들게 하고…….

 햇살 좋은 날에는 아침에 복숭아를 따도 저녁때가 되면 노릇노릇한 게 수두룩해 언제 복숭아를 땄나 싶은데도, 노랗게 익은 것만 고집하셨던 아버지. 복숭아가 식탁에 오르는 시간을 고려하면 푸른빛이 도는, 육질이 단단할 때 따 올려야 하는데, 아버지는 소비자들이 덜 익은 걸 먹을까 봐 그러셨나 보다.

 찬바람에 냉해를 입은 나무처럼 아버지 몸에도 바람이 들었다. 진단 결과도 뜻밖이었다. 암이 2기까지 진행되었을지도 모르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산소 돌보는 일에다 어머니마저 몸져누우시어 매년 봄이면 받아오던 종합 검진 시기를 놓치셨다. 의술의 발달로 말기 증세의 환자까지 병석을 털고 나오는데, 수술대에 오른 아버지는 공교롭게도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진 뒤였다.

 과수원을 판다는 소문이 주변에 널리 퍼졌다. 소문은 물이 흐르듯 바람처럼 떠다니게 마련이다. 친구들마저 내게 경위를 물어왔다. 아버지 심경에 변화가 온 것인가. 당신의 운명을 알고 계셨던 건가.

 복숭아나무 해가 갈수록 세력이 약해져 간다. 아버지의 운명을 따라가는가. 밑동이 병들고 가지가 부러지고 영양분을 제대로 못 받아 말라죽는다. 쉬 늙어버린 것처럼 여린 바람에도 흔들린다.

 한 줄기 바람이 과수원을 휩쓸고 지나간다.  아버지의 체취가 배어난다. 작업 공간인 비닐하우스, 소독줄, 나무를 괴는 받침대, 저울, 포장 상자…….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잘 익은 복숭아를 따 가지고 나오며, 이거 하나 먹어보라고 하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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