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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06. 2023

큰일

『2010 부평 삶의 문학상 공모전』우수상 수상작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탈곡이야말로 무릇 농부들에겐 큰일 중의 큰일이다. 그런데도 난 뒷짐만 진 채 이리저리 논둑을 왔다 갔다 하고만 있다. 깔아놓은 멍석에 드러누운 채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마름이나 양반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탈곡은 예전처럼 더딤과 거치적거림을 거부한다. 콤바인의 자동화 시스템에 따라 벼 베는 일부터 탈곡까지 모든 공정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논바닥의 벼를 베 탈곡부로 끌어올리고 나면 레일 식으로 연결된 기계 장치로 보내져 낱알을 털어낸다. 낱알은 곧 운전석 뒤에 자리한 용량이 큰 저장고에 담긴다. 콤바인을 다루는 기사와 허드렛일을 챙기는 도우미 한 명만 따라붙으면 하루에 30여 마지기의 논 수확도 거뜬하다.

 그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타작하려면 새벽닭이 울기 전부터 일꾼들을 불러 아침밥을 먹여야 했다. 일 량이 많으면 여러 사람이 대들어도 하루에 해내지 못한다. 주영이네가 타작하는 날이었다. 그때는 시계가 귀해 그랬겠지만, 일꾼들이 아침밥을 먹고 났는데도 날이 새지 않아 한참을 더 자고 일어나서 일을 시작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타작할 때 반자동 탈곡기를 사용했었다. 그전에는 ‘와랑 와랑’ 소리가 난다 하여 “와랑”이라 이름 붙여다. 이는 원통형 쇠틀에 나무판을 잇대어 고정하고는 나무판에는 길쭉하고도 가는 못을 구부려 박은 것인데 장정 두 사람이 하단부에 있는 발판을 동시에 힘을 주고 밟아야 작동을 한다. 벼 탈곡 과정이 힘들고 고되다 보니 발판을 구르는 일꾼들은 밥을 먹어도 금세 쑥 내려가니 새참을 달라고 야단이 났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손이 많이 가는 게 벼농사다. 초기 농사는 논을 갈고 써레질하고 거름을 내며 벼를 논에 내는 과정이 이어진다. 임신과 태교를 거쳐 태어난 갓난아이가 어미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자라는 유아기로 볼 수 있다. 우선 잘 말려둔 볍씨를 광에서 내어 소독한 물에 담가 따스한 방에서 여러 날 시간을 두고 틔워낸다. 그런 다음 모판에 흙을 깔고 틔워낸 볍씨를 그 위에 뿌린 뒤 재차 모판에 흙을 얹어 못자리로 옮겨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경험이 많은 사람도 일 년 농사나 다름없는 못자리를 더러 실패하는데 갓난애가 어떻게 될까 봐 안달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모를 내기 전까지는 애가 다 탄다.

 다음 단계는 모판에서 나온 어린 모를 들판으로 내는 시기이다. 엄마 곁을 떠날 수 없는 아동기와 청소년기로 보면 된다. 자식을 정성껏 키워야 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으니 근심이 태산이다. 물이 새던 논이나 무너진 논두렁이 있으면 모를 내기 전에 미리 손봐 놓아야 한다. 논둑의 잡풀을 태우고 비료도 준비해야 한다. 모를 이앙할 때는 6~7포기씩 떼어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줄을 맞춰 심는 기술이 요구된다. 그래야 바람이 잘 통하고 병충해를 막을 수 있다. 골이 넓고 똑발라야 비료를 뿌리거나 다른 작업을 할 때 불편하지 않다.

 모를 심고 나면 3~4일 안에 초기 제초를 해야 하는데 때를 놓치면 여름 내내 잡초와 씨름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건강한 몸을 위해 시기별로 아이에게 예방접종을 하는 것처럼 여린 모일 때는 손이 많이 간다. 논물 조절하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다. 땅 힘을 받기 전까지는 모살이가 심한데 물 조절을 잘해야 탈이 없다. 논에 물을 너무 가두면 모가 녹아버리고, 논에 물이 없으면 모가 타 죽는다. 농부들은 논에 물 들어가는 거 하고 자식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것을 보면 배부르다 했다. 전에는 물이 귀해 남의 논둑에 지게작대기로 구멍을 내면서까지 야밤에 물을 대는 얌체 짓을 하는 집도 있었다. 정말이지 이때는 사돈도 없고 이웃도 없다.

 모가 어느 정도 자라면 적당한 시기에 농약을 치고 모의 자람과 발육 상태를 살펴 적당량의 시비(施肥)를 해야 한다. 풀이 잘 자라는 때라 논둑 풀을 깔끔하게 베어줘야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듯 이 시기엔 논을 보듬고 쓰다듬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지, 친구들하고는 사이좋게 지내는지 걱정하듯이 늘 걱정을 두고 산다.

 여름 내내 뙤약볕을 쏘여가며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도 날씨가 도와줘야 한다. 가뭄이 들거나 홍수나 태풍으로 재해를 입으면 내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아리고 쓰라리다. 자식이 커서 시집을 보내거나 장가를 들여도 근심이 떠나지 않아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듯이 늘 하늘을 올려다보고 산다.

 논에서 벼를 거두는 일도 품이 많이 들지만 뒷일도 녹록하지 않다. 탈곡하고도 여러 번 손이 가야 한다. 지금이야 온풍기가 있어 벼 말리는 과정이 수월하지만, 그전에는 벼를 멍석에 일일이 펴 말려야 했다. 도중에 비라도 만나는 날이면 멍석을 끌어들이느라 곤욕을 치다. 그렇게 애써 벼를 말리고 나서야 농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는다. 도정(搗精)하는 것을 지켜보며 허리를 편다.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쌀밥을 먹는 즐거움을 누린다.

 들녘이 황금빛으로 수놓으면 메뚜기까지 너울너울 그네를 탄다. 벼가 잘 자라도록 기운을 북돋아 준 햇볕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거친 몸뚱이를 깎고 다듬어 논바닥의 흙살을 부드럽게 해 준 바람의 손길도 고맙다. 그 뜨거운 여름날 목을 축여주고 영양이 돌도록 생명의 길을 터준 물의 은혜로움도 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농사꾼의 마음을 애석하게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농작물 값이 들쭉날쭉해 배추 한 포기에 3~4천 원 하다가도 어느 해에는 그냥 가져가라 해도 가져가지 않을 만큼 천덕꾸러기가 된다. 찹쌀 값이 때에 따라 가마당 20만 원에서 25만 원까지 오르내리면 메벼 대신 찰벼를 심을 수밖에 없다. 쌀값이 좋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그것 말고도 내게는 큰일이 더 있다. 어머니의 마음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거다. 장에서 국밥 한 그릇 사 드시지 않고 아끼느라 쥐어짜면서도 자식들에게 매번 주머니를 연다. 이듬해 농사 밑천도 쟁여 놓아야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에는 둘째가 불쌍하다며 벼 매상한 돈을 절반 이상 주었다. 작년에는 바로 밑에 있는 동생이 생활이 어렵다니까 농사지은 돈 1천만 원을 거리낌 없이 내주셨다. 돈이 없으면 절절매면서도 늘 그러신다.

 하는 수 없어 나는 추수가 끝나기 전에 어머니에게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올해만큼은 제발 돈을 움켜쥐고 계시라고. 그게 소원이라고. 소원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정말 큰일이다.


(『2010 부평 삶의 문학상 공모전』우수상 수상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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