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의 모든 만물은 외로움을 탄다. 인간만이 아니다. 오도카니 서 있는 쉼터의 정자도 나뭇가지도 막 올라오는 풀잎도 외롭다. 떨어진 낙엽마저 죽을 만큼 외로워 바닥을 뒹군다.
뒤뚱뒤뚱 작은 몸짓으로 낙엽 속에서 먹이를 쪼는 산새는 이곳을 찾은 이가 반가워 정자 지붕 위로 포르르 날아오른다. 청설모도 내가 다가가자 참나무 둥치를 기어오르고 옆에 있는 소나무로 옮겨 다니며 곡예를 한다. 산모퉁이를 돌다 보면 참나무 위에 소쇄하게 엮어 만든 까치집이 있는데, 알고 보면 까치 또한 사람 사는 소리 들리는 아파트 최단 거리에 집을 마련하고 외로움을 풀어내고 있는 거다.
무심천변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S아파트에선 뒷동산이 바로 코밑에 있어 틈만 나면 오르내렸는데 지금은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어서 탐탁하지 않다. 사람 간의 접촉이 반갑지 않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산책한다. 사람들이 근접 거리에 오면 잠시 딴전을 부리거나 아예 다른 길로 옮겨가기도 한다. 운동장에서 달리기 할 때처럼 동쪽으로 돌곤 했는데, 늘 가던 길을 마다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영․정조 시대의 북학파이며 실학자인 이덕무는 어느 날 밤 몸에 벼룩 떼가 달라붙어 성가시게 할 때 그 긴긴 하룻밤이 일 년 같다고 했는데, 요즘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출현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와중에 지난 14일, 홍성을 거쳐 서해 바다에 다녀온 뒤에 탈이 생겼다. 속이 거북해 체했나 싶어 소화제 처방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해삼 멍게 피조개 새조개 이외에 같이 주문한 주꾸미가 배탈의 원인일까? 냄비 속에 동동 띄운 배춧잎과 냉이가 균을 옮겼을까? 그게 아니면 다음 날 먹은 갈비찜이 원인일까? 아니, 코로나바이러스가 내 몸에 기어들어 와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렇게 여러 날 뱃속에 기생하며 우글거리게 한 매개체일 수도 있다. 전염병 창궐로 세상이 뒤숭숭한데 몸까지 편치 않으니, 내 몸에도 벼룩이 달라붙은 것처럼 근심을 떼어내는 하루하루가 일 년처럼 버겁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여러 날 위장이 격하게 요동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북을 둥둥 울리는 북 치는 소년을 만났고, 현악 4중주를 거칠게 연주하는 악단과 함께 있기도 했다. 어떤 날 한밤중엔 격한 리듬의 교향곡 7번을 흉내 내는 바람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야 했고, 그 요란스러운 콘서트장에서 빠져나오느라 애를 먹었다. 단원들이 연주를 끝내고 다음 곡 준비를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그 짧은 시간 나 또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늘 자던 시간 잠들지 못한 채 내 배를 쓰다듬어 보는 뜻하지 않은 보살핌을 배웠고, 음식물이 내장의 활발한 움직임과 체내의 화학작용을 거쳐 에너지로 쓰이지만 때로는 외부 침입자가 있어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그 순간을 안타까워했다. 목구멍에서 항문까지 배설의 여정이 늘 같은 순환의 길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고, 노폐물이 체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일정하지도 않으며, 용변을 보는 시간이 정해진 시간이 아닐 때면 불편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하고도 남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와중에 허리를 삐끗해 몸의 자유로움마저 잃어가면서도 전염병 감염 우려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자가 치료에 연연하며 내 몸을 믿어 보는 의지를 시험했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엔 머리맡에 두었던 책장을 넘기며 삶의 언어에 밑줄을 긋고,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문장이라도 발견하면 메모장에 남기고는 읽고 또 읽으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위무했다.
얼룩이 일부분이지만 부분 세탁이 되지 않는다. 점만 하던 것이 조개 만해지고 그것이 부풀어 밥공기처럼 부풀어 있다. 지난 시간의 얼룩들을 빨래판에 올려놓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옷가지와 이부자리에 방망이질할 때 같이 비벼 빤다. 자박지박 빨래판을 문지르며 내재한 앙금을 씻어낸다. 배어나는 비누 거품에 잡념들을 풀어낸다.
고통은 극복하는 게 아니다. 견디는 거라 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을 뽑는 면접관의 자격으로 일한 시간만 기억하려 한다. 내가 일을 보는 동안 내포 신도시 내 커피숍이나 잡화점이나 쇼핑센터에서 시간을 보냈을 아내의 반나절을 떠올리려 한다. 그 많은 식당에 식객이 없어 주인들이 어항 근처를 서성이며 뜰채로 허공을 긋고, 손님들도 쭈뼛쭈뼛 주인 눈치만 보던 저녁 풍경은 기억에서 밀어낸다.
살다 보면 출구가 보인다. 어떤 고난에 봉착해도 지내다 보면 그 일이 언제인 양 잊히기 마련이다. 왜 그리되었지,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하고 양파껍질 벗기듯 과거의 시간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일은 후회로만 남을 것이다. 악몽 같았던 삶의 얼룩들이 몸에 붙어 다니는 건 어쩌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는 비워내게 마련이다. 이렇게 집에서 나와 신작로를 건너고 언덕을 지나 아내와 같이 산에 오르는 오늘, 내가 나에게 묻는다. 내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
걱정거리 난무해도 그것은 예전 일이다. 햇볕의 방향 따라 몸을 움직여본다. 산을 오르는 길에도 뒷동산에도 벌써 새순이 돋는다. 2월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3월이다. 좋은 친구 만나 속내를 털어놓고 싶다. 뽀르르 올라오는 봄의 서곡에 희망을 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