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그리워하는 것 말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또한 고역입니다. 어떤 이를 그리워하다 눈물샘이 마르면 가슴에 넣어두고 살면 그만이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임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만큼 힘들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잊힌 연인이라면 체념하고 살지만, 오지 않겠다고 절교하고 떠난 것도 아니라면 포기하기도 이릅니다. 그렇다고 언제 온다고 날짜를 정하고 가면 모를까 기약도 없이 떠나버린다면 애간장이 다 녹습니다.
이앙기나 콤바인이 들어갈 수 없는, 쟁기로 논 갈고 하늘 물 받아서 농사짓는 천수답이라면 모를까, 논이 멀쩡한데 비가 내리지 않아 모내기하지 못하는 논도 적지 않습니다. 밭골에서는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도 먼지만 풀풀 쏟아냅니다. 충주호 저수량도 적정량은커녕 바닥을 드러낼 정도라 하고, 일기예보를 들어도 속 후련하게 비 내린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게 합니다.
수확기에 든 감자는 그 크기가 새알만 하고 가지는 곧게 뻗지 못해 제 몸에 닿을 정도로 휘어져 있습니다. 배춧잎은 누렇게 뜨고 상추와 쑥갓 잎도 물기가 없어 배배 틀어집니다. 내다 팔 농작물은 제때 물 먹음이 없어 상품 값어치가 떨어져 울상을 짓습니다. 축산농가도 조사료 생산량이 적어 외국에서 수입해 쓸 지경이라고 하니 온 나라가 물 걱정합니다.
마리로오랭생은 그의 시「잊혀진 여인」에서 버림받은 여자보다 좀 더 가엾은 것은 의지할 데 없는 여자요, 의지할 데 없는 여자보다 좀 더 가엾은 것은 쫓겨난 여자요, 쫓겨난 여자보다 좀 더 가엾은 것은 여자는 죽은 여자요, 죽은 여자보다 좀 더 가엾은 것은 잊힌 여자라고 했는데, 요즘 농민들의 심정이 잊힌 여자를 바라보는 심정일 것입니다.
빗물은 잠자는 생명을 깨웁니다. 물기를 보관해 놓았다가 새싹을 내밀게 하고 잎을 돋우며 줄기를 뻗어 올리게 합니다. 비는 언제 내릴까? 비가 온다 해도 흡족하게 내리기나 할까? 가뭄이 들 때마다 농민의 가슴은 소태가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도 다가가지 못해 애태우는 연인처럼 농민들은 하늘바라기가 됩니다. 이성선(1941∼2001) 시인은 그의 시「천수답」에서 천수답엔 밤마다 큰 별이 내려와 잠들고, 하늘의 눈물이 벼를 기른다고 했습니다. 농부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는 것도 비라고 했습니다.
농민들은 척박한 땅이라 해도 저버리지 않습니다. 설령 올해 가뭄으로 인해 농사를 망친다 해도 농민들은 땅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에 농사를 망쳤다 하더라도 땅을 갈아엎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부(富)를 창출하려 농사를 짓겠지만, 그렇다고 돈만 생각하고 농사짓는 것은 아닙니다. 한 톨의 식량이라도 더 얻으려 몸부림치다가도 소출이 적으면 다음 해에 더 거두면 되지 하고 땅에 감사하고 삽니다. 못난 자식이든 잘난 자식이든 부모가 품고 가듯 자연의 혜택에 고마워하고 슬픔과 기쁨도 땅과 함께합니다.
비를 맞고 싶습니다.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비를 맞고 싶습니다. 빗물이 머리카락에 닿아 몸을 타고 흐르고 발끝까지 흘러내려도 고스란히 비를 맞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서 빗물의 감촉을 느끼고 빗물의 온기를 느끼고 싶습니다. 비가 주는 언어를 전해 듣고 비가 던지는 아픔을 더듬고 싶습니다. 온 대지를 빗물로 적셔 촉촉해지면 저 들판으로 달려가 벼 포기를 부여잡고 물을 빨아먹는 식사에 초대받고 싶습니다.
왠지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온 대지가 촉촉이 적어 있을 거야 하는 마음으로 저녁을 맞습니다. 오늘 밤 지나가기 전에 들판의 작물들이 목마름 떨쳐 버리고 긴 호흡하는 노랫소리를 기대합니다. 빗물이 창을 두드려 잠에서 깬다 해도 그 선율에 몸 맡기며 대지에서 번져오는 흙냄새를 마냥 들이켜는 시간을 상상합니다.
비를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비에 대한 목마름이 없었으면 합니다. 농민에게 비는 눈물입니다. 가슴 저 밑바닥을 촉촉이 적시는 샘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