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짜장면
어린 꼬마가 시내버스에 오르자마자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에게 짜장면을 사달라고 조른다. 다섯 살을 갓 넘겼을 것 같은 애조차 <자장면>이라 하지 않고 짜장면이라고 한다. 하긴, <자장면>이라고 발음하면 조리 과정에서 맛깔스러운 양념 하나가 빠져 제맛이 나지 않을 듯싶다.
게에티이미지
나나 내 아이나 S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청주 사람이나 아는 사람 대부분은 S고등학교를 ‘쎄고’라고 부른다. <세고>라고 하면 괜히 약해 보이고 공부도 못하는 학교처럼 들려서 그런 것 같다. 공짜 좋아하는 사람이 노력은 안 하고 ‘꽁짜’만 찾는 식이다.
대학생들 사이에선 <과 선배>를 ‘꽈 선배’로, <과 대표>를 ‘꽈 대표’ 또는 ‘꽈대’로 호칭한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편하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다. 자신을 잘 봐달라고 상대방에게 완장을 채우기 위한 언어 수단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같아서 좋고, 리더십을 잘 발휘해 달라는 부탁의 말로도 들려 말해준 사람이 고마울 것이다. <효과>를 ‘효꽈’로 발음해야 효과를 더 낼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수일과 심순애> 극에서 그런 징후를 보았다. <수일>을 ‘쑤일’로, <순애>를 ‘쑨애’로 외치고 부르지 않았던가. 오래전에 전파를 탔던 ‘싸~랑과 쩡~열을 그~대에게’ 라는 광고 카피가 아직 가슴속에 남아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그 기억 강렬하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처한 문화와 생활 행태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이 처한 절박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행동의 발로이며 잠재된 욕망의 표출이기도 하다. 자식이나 손자 손녀를 부를 때에도 <새끼>보다는 ‘쌔끼’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고, <소주> 또한 ‘쏘주’나 ‘쐬주’라고 해야 술맛이 난다. 이러다간 <돈>을 ‘똔’으로 발음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말을 줄여서 하거나 센 발음을 하는 현상이 늘어나는 이유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로 보인다. 말을 많이 하면 몸에서 힘이 빠진다. 떠버리의 말을 들어줄 때도 정신이 얼얼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듯 에너지 소모량이 많으면 몸은 쉽게 지친다. 그러기에 말을 줄여서 하고 약어를 쓴다. 그런 이유 말고도 센 발음을 하는 것은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말할 때 상대방이 딴전 피우지 말고 자기 말을 끝까지 들어 달라는 주문,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결딴을 내겠다는 무언의 압력이며 신호일 수도 있다.
평소에 이루고 싶거나 가지고 싶어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런 욕망은 꿈이나 욕구와 연관된다. 남 앞에 당당하게 내보이고 싶은 것이거나, 마음속에 내재한 응어리 같은 것들일 것이다. 꿈(도전 의식), 꾀(임기응변), 끼(재능), 깡(노력), 끈(인맥), 꼴(외모), 꾼(전문성). 이와 같은 것들은 누구에게나 바람이고 소망이다. 그중에 서너 개 정도만 갖추어도 좋겠다고 말한다. 나 역시 남 앞에 당당히 내보일 만한 ‘쯩’도 없다. 값 될 만한 ‘껀’도 못 만든다. <꽝>이다. 그런 걸 알면서도 늘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낸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고 있다. ‘쑥맥’이나 다름없다.
한때는 못나고 갖추지 못해 구석으로 내몰린 처지 안타까워 몸부림친 적 있다. 아픔이나 상처를 씻어내고 싶어도, 무엇인가 보상받으려 해도, 그러지 못한 채 주변만 맴돌던 시절, 그런 과정을 지나 지금 여기에 있다. 욕망과 꿈은 사회 현상을 넘어 가슴속에 쌓인 한(恨)일 수도 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둠의 찌꺼기를 말갛게 비워냈으면 하는데 마음먹은 만큼 되지 않아 그리되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약한 자의 슬픔이 녹아 있다. 암울한 역사가 들어 있다. 짧게는 ‘권력의 칼’을 휘두르는 정치꾼에서 저 멀리 한반도가 태동했던 아득한 옛날까지. 강대국에 쥐어박히고 끌려다닌 그런 진저리 치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끄집어내기도 괴롭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한반도는 그런 불리한 지정학적 요인에서 불안해하고 강대국의 입김에 주눅 들어왔다. 무한경쟁과 거침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버티지 못하고 떠밀려왔다.
지금은 부와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정보화 물결이 요동치고 압축과 빠름을 강조하는 사회에 내몰려 있다. 그런 환경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떠한 변환 과정을 거칠지 모른다. 멀쩡한 단어를 줄여서 쓰고 은어를 만들거나 약어를 쓰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언어의 변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젊은이들이 하는 말이 개중에 해석되지 않아 쩔쩔매기도 한다. 생활양식이 다양해지고 복잡한 시대적 상황에서 짜장면 맛에 길들 듯 이런 언어 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자장면>이면 어떻고 짜장면이라고 발음하면 또 어떤가. 지붕이 번듯하고 방바닥에도 기름때가 찌들지 않은, 그러면서도 주인장 손톱에도 때가 끼지 않은 근사한 집이라면 짜장면이 더 맛있을 것 같다. 파, 마늘, 당근, 고추, 생강, 양파, 양배추 등 갖은 채소에다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춘장에 비벼 나온 짜장면이 생각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