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바꾸려다 중심을 바꿨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지는, 지금 내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사는지를 꽤 솔직하게 보여준다.

가끔은 내 의지보다 더 정확하다.


한동안 나는 “주변 사람이 왜 이래?” 같은 말을 쉽게 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특히 그랬다. 누구는 말만 많고, 누구는 책임을 피해 가고, 누구는 똑같은 불만을 매일 갱신했다. 그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관계를 갈아 끼우면 인생도 환기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상한 장면이 겹쳐졌다.

내가 점심시간에 하는 얘기, 퇴근길에 읽는 기사,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것들이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똑같은 주제, 비슷한 감정, 같은 결의 사람들. 내가 선택한 관심이 나를 데려간 게 아니라, 그 관심이 사람을 데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결과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이효리가 아이유에게 했다는 말이 그때 꽂혔다.


멋진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쉽게 만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니 그제야 멋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말.


듣는 순간은 예능의 한 장면이었는데, 며칠 뒤부터는 생활의 규칙처럼 남았다. 누군가를 바꾸는 방법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바꾸는 방법이 더 현실적이라는 뜻 같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어느 시기엔 내가 늘 비용 얘기를 했다. 시간 대비 효율, 인력 대비 성과, 왜 이 구조로는 사람이 소모되는지.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말이 내 하루의 공기를 잠식했다는 거다. 그렇게 살아가면 주변도 비슷해진다. 모이면 업계 얘기, 숫자 얘기, 누가 더 힘든지 경쟁하는 얘기. 문제를 분석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끝내는 사람은 줄어든다. 나는 그 안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웠는지 솔직히 돌아보게 됐다.


다른 시기엔 내가 시스템에 꽂혀 있었다. 새 도구, 자동화, 코드, 업무 흐름 표준화. 그러면 자연스레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결된다. 말이 통하니까 속도가 붙는다. 그런데 그 속도에 취해 있으면 또 다른 것을 놓친다. 사람의 마음이 따라오는 속도는 언제나 시스템의 속도보다 느리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왜 이렇게 답답하지?”라는 말이 내 입 밖으로 먼저 튀어나온다. 그때부터 관계는 다시 거칠어진다.


차인표·신애라 부부가 컴패션을 만나며 삶의 시선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비슷한 결로 다가왔다. 관심이 움직이니 대화가 움직이고, 사람이 움직였다는 것. 나는 그 얘기를 현실적인 힌트로 받아들였다. 내 관심의 방향이 바뀌면, 내 주변의 얼굴도 바뀔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


생각보다 큰 원리는 결국 단순한 데서 반복된다.


마키아벨리가 사람을 보려면 그가 누구와 어울리는지 보라고 했다는 말도 떠올랐다. 날카로운 문장이다. 동시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나는 관계를 ‘운’으로만 설명하려 했던 적이 많다. 근데 곁의 사람들은 대부분 우연이 아니라 선택의 누적이었다. 내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고르고, 어떤 이야기 앞에서 오래 머무르고, 어떤 감정을 자주 꺼내는지가 결국 사람을 남긴다. 그게 불편한 진실이면서도, 바꿀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 얘기를 할 때 문장을 조금 바꾼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보다 “내 중심을 좀 제대로 잡자”는 말을 먼저 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전자는 외부를 향하고, 후자는 내부를 손본다. 전자는 기대에 가깝고, 후자는 책임에 가깝다.


내 중심이라는 게 거창한 철학은 아니다. 아주 사소한 선택들이다. 내가 어떤 이야기에 귀를 오래 기울이는지. 누군가의 뒷말을 들을 때 웃어넘기는지, 흐름을 끊는지. 일이 꼬였을 때 원인을 찾는 데서 멈추는지, 마감이라는 문 앞까지 가는지. 내가 무엇에 시간을 쓰고, 무엇에는 시간을 쓰지 않기로 하는지. 사람들은 그걸 보고 나를 읽는다. 나도 그걸 보고 내 삶을 읽는다.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으려 애쓰는 시간도 중요해졌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바깥 관계도 금방 거칠어진다. 불필요하게 예민해지고, 작은 말에 과잉 반응하고, 상대의 표정을 과하게 해석한다. 그런 날이 누적되면 결국 세상은 전부 나를 시험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그때 만나는 사람들은 내 편이든 아니든, 전부 피곤해진다. 나도 피곤해진다.


그래서 한동안은 아주 기본으로 돌아가 보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약속하고, 약속한 만큼은 지키는 방식.

불필요한 비교를 줄이고, 내가 잘하는 한 두 가지를 꾸준히 반복하는 방식.

좋게 말하면 절제고, 솔직히 말하면 생존이다.

그걸 해보니 신기하게도 주변의 온도도 조금 바뀌었다.

말이 빠른 사람보다 일을 끝내는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불평을 연료로 쓰는 사람보다 조용히 버티는 사람들과 더 자주 연결됐다.


결국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결과다.


전에 나는 그 결과를 바꾸려고 관계만 손봤다.

연락처를 정리하고, 모임을 줄이고, 거리 조절을 했다. 그게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보다 먼저 손봐야 하는 게 있었다. 내가 무엇에 끌리는 사람인지, 내가 어떤 대화를 반복하는 사람인지, 내가 어떤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사람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느냐가 내 세계의 모양을 바꾼다.

그 말이 지나치게 멋져 보이면 이렇게 바꿔도 된다.

내가 지금 뭘 중심에 두고 사는지가, 결국 내 옆자리의 얼굴을 결정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사람을 바꾸겠다는 말 대신 중심을 바꾸겠다고 말한다.


그게 더 오래가는 방식이어서.

그리고 생각보다 덜 후회하는 방식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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