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꽃을 피우기 위해, 나는 오늘 사랑을 버린다
칭다오의 밤은 깊었고, 손에 쥔 어머니의 편지는 무거웠을 것이다. 집을 떠난 지 8개월. 편지 속에는 보고 싶다는 부모님의 눈물과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는 아내의 고단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편지의 끝은 준엄했다. 집 걱정은 마라, 나라를 위해 살아라. 그 한마디가 청년 윤봉길의 가슴을 후벼 팠을 터다. 그는 답장에 썼다. 부모와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음을 각오했다고. 사람은 왜 사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라고 답하며, 인간으로서의 사적인 정을 억누르고 역사의 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상하이로 향하기 전 공을 들인 것은 농촌계몽운동이었다. 그가 쓴 <농민독본>을 보면 그가 꿈꾼 세상이 명확히 보인다. "나는 농부요 너는 노동자다. 우리는 똑같은 일하는 사람이다.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여전하던 시대에, 그는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먼저 깨우쳤다. 못난 사람은 농민이 아니라, 스스로 농민임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이다. 머리에 돌이 눌리고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로는 결코 자유를 찾을 수 없다는 그의 외침은, 단순한 문맹 퇴치를 넘어 한 인간이 제 발로 서게 하는 '주체성'의 교육이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중의 자유가 있어야 개인의 자유도 비로소 완성된다는 그의 믿음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불꽃으로 타올랐다. 이 거사는 사그라들던 임시정부의 불씨를 살렸고, 장제스의 후원을 이끌어내며 훗날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하는 역사적 뿌리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공기처럼 당연해진 오늘, 오히려 그 소중함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특히나 그 가치가 사라진 북한의 현실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윤 의사가 가졌던 그 서슬 퍼런 정신을 되묻고 싶다. "나도 이상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한다"던 그 당당함이 우리에겐 남아 있는가. 위기에 빠진 시대를 구하는 건 화려한 말잔치가 아니다.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 더 큰 가치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그 '강의한 사랑'의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