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명함에서 회사 이름을 지우면 무엇이 남습니까

유명한 기업의 로고가 박힌 명함을 처음 건넬 때의 그 묘한 감각을 기억한다.

상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예우 섞인 말투.

그 찰나의 경험은 중독적이다.


우리는 그 대우가 오롯이 나의 능력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서 있는 거대 자본과 시스템을 향한 경의에 가깝다.

많은 직장인이 여기서 첫 번째 착각을 시작한다.

조직의 규모가 곧 나의 크기라는 착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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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갯속을 항해하는 배에게 리더의 구조적 설계는 등대와 같다.

무작정 빨리 오라고 소리치는 게 아니라,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비추어 배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돕는 역할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등대의 빛을 받고 무사히 항구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 배가 안개를 스스로 헤칠 능력을 갖춘 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등대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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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손종원 셰프가 던진 한마디는 커리어의 본질을 꿰뚫는 서늘한 자각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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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3 스타 레스토랑 세 군데에서 일을 했지만, 그곳들이 저를 3 스타로 만들지는 않더라고요."


세계적인 주방의 시스템 안에서 최고의 요리를 내놓았을지언정, 그건 그 주방의 성취이지 본인의 온전한 성취가 아니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결국 '나의 별'은 내가 직접 깎고 다듬어 만들어가야 한다는 그 말은, 매일 아침 남의 별을 빛내기 위해 출근하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때린다.


수많은 인재의 입사와 퇴사를 지켜보며 깨달은 잔인한 진실이 하나 있다. 대형 조직의 부품으로 완벽하게 기능하던 사람이 조직 밖으로 밀려났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자유가 아니라 '공포'라는 사실이다. 시스템이라는 근육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자신의 연약한 민낯을 보는 것이다.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건 당신의 논리였습니까, 아니면 회사의 자금력과 브랜드였습니까? 당신의 전화 한 통에 협력업체가 움직인 건 당신의 평판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당신 책상 위에 놓인 명패 때문이었습니까?


이 질문들에 선뜻 답하기 어렵다면, 지금 당신은 타인의 엔진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조금 더 불친절해질 필요가 있다. 회사가 제공하는 안락한 가이드라인 밖에서, 아무런 후광 없이도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실체적인 기술'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단순히 연차를 쌓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거대한 등대를 이용해 나만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영리함이 필요하다. 언젠가 등대의 불빛이 꺼지거나 내가 항로를 바꿔야 할 때, 스스로 빛을 내어 안개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자가발전기 하나쯤은 품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는 나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 다만 나의 가치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비싼 실험실이 되어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속한 조직의 이름을 나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이름표를 떼고 나서도 시장이 나를 찾는 이유, 그 한 가지를 만드는 데 커리어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남이 차려준 3 스타의 주방에서 만족하지 않고, 투박하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든 별 하나를 가슴에 품는 것. 그것이 직장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프로페셔널로 거듭나는 유일한 길이다.


안개는 언제든 다시 짙어질 수 있고, 등대는 언제든 꺼질 수 있다. 그때 내가 길을 잃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나 스스로가 빛나는 존재가 되는 것뿐이다. 나의 진짜 커리어는 명함이 사라지는 그날,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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