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받는 영포티 청춘들에게

티브이는 리모컨이 없어서 손으로 채널을 돌려야 했다. 화면이 흐리면 안테나를 이리저리 만지며 화질이 잡히는 각도를 찾았다. 아침밥을 먹고 나가면 동네는 놀이터였다. 스카이콩콩을 타고 뛰어다니다가 해가 넘어갈 때까지 얼음땡,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 오징어, 다방구를 하며 놀았다.


문구점은 내 세계의 중심이었다. 빌리진, 이랜드, 모닝글로리, 아트박스 같은 이름들이 낯설지 않았고, 새 노트와 펜을 사는 일은 작은 축제였다. 만화영화는 또 하나의 일상이었다. 캔디, 은하철도 999, 아톰, 빨간 머리 앤을 보며 웃고 울었다.


그 시절에는 민방위훈련이 있었다. 야간소등을 하고 촛불을 켜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어느덧 나이가 더해져 출석체크를 위한 민방위도 한참 전에 끝났고, 촛불은 어느새 사랑과 희망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마저도 이제는 아이돌 그룹의 응원봉으로 대체되었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를 다녔고, 하굣길에 애국가가 울리면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가던 길을 멈춰 서야 했다. 웅변학원과 주산학원은 거의 필수처럼 다녔다. 수학학원은 속셈학원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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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국가의 얼굴처럼 다가오던 때였다. 86 아시안게임을 통해 공설운동장이라는 말이 익숙해졌고,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기사에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열광했다. 단거리 제왕 장재근은 시간이 흐른 뒤 에어로빅을 하며 또 다른 세대의 영웅이 되었다. 88 올림픽의 호돌이 인형을 안고 굴렁쇠를 굴리기도 했고,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의 대결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다. 벤 존슨이 약물로 금메달을 박탈당한 일은, 그때 처음으로 영웅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를 따라 부르던 기억은 지금 들어도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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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비디오쟈키의 현란한 뮤직비디오는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았다. 고교 시절엔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받았다. 여자친구들은 가정 과목에서 바느질을 배우고, 남자친구들은 실습과 기술을 배웠다. 잡지는 스크린과 로드쇼를 돌려봤고, 리버 피닉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펑펑 울기도 했다. 농구는 마이클 조던과 샤킬 오닐이 뜨겁게 만들었고, 우리는 슬램덩크와 드래곤볼, 북두신권을 달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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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의 전성기도 함께 지나왔다. 주윤발이 “사랑해요 밀키스”를 외치고, 왕조현이 “반했어요 크리미”를 말하던 장면을 TV로 보며 진짜로 시대가 변하는 것 같았다. 비디오 대여점에 들락거리며 영웅본색, 첩혈쌍웅을 빌려 보던 밤들이 있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워크맨으로 녹음해 듣기도 했다. 반주 중 멘트가 들어가면 녹음이 망가져서, 멘트가 없는 구간을 골라 테이프를 되감던 시간도 있었다. 워크맨은 소니와 아이 와가 유명했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동네를 휘젓고 다녔고, 조금 큰 형들은 유로댄스라는 춤을 열심히 췄다. 건강 다이제스트를 몰래 보다가 들켜 혼난 적도 있다. 교복이 부활하던 시절, 나는 다행히 자율복 학교를 다녔다. 닉스, 스톰, 리바이스,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같은 브랜드가 유행했지만, 우리 집 사정에서 늘 최선은 아니었다. 그때는 엄마가 밉기도 했는데, 이제는 아이 둘을 키우는 내가 되어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최선이었는지 안다.

성문 기본영어, 맨투맨, 수학의 정석을 붙들기 위해 단과학원을 다녔고, 학원비 셔틀만 했던 시절도 있었다. 회수권을 다발로 사서 아끼려고 11장으로 작업해 잘라 쓰기도 했다. 반으로 잘라 넣는 불의를 저지른 적도 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때를 통과해 온 내가 지금 더 사람을 이해하게 됐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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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은 500원짜리 동전으로 한 곡을 부르던 곳이었다. 락카페는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춤을 춘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했다. 중학교 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고, 바람이 불면 압구정동에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전 엑스포는 단골 견학 코스였고, 기대만큼 볼 게 많지 않았다는 기억이 더 선명하다. 제도의 변화란 변화는 다 겪으며 그렇게 사회인이 되었다. 중요한 고비마다 불리한 시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결국 열심히 살았다. 문득 뒤돌아보니 벌써 40대를 지나 50대를 코 앞에 두고 있다.


지금은 비록 세상의 눈치를 보는 월급쟁이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통과한 세대다. 한때는 오빠들에게 목숨을 걸던 뜨거운 청춘이었고, 지금은 폭풍 잔소리를 쏟아내는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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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라는 말이 쉽게 소비되고 쉽게 조롱받는다. 젊지도, 늙지도 못한 어중간한 나이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단어 뒤에는 가족을 먹이고, 조직을 버티고, 관계를 책임지고, 매달 통장을 견디며 살아낸 시간이 붙어 있다는 걸.


조롱받는 영포티 청춘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애매한 세대가 아니라, 두 시대를 잇는 세대다. 한 번도 쉬운 적 없었지만 여기까지 왔고, 그러니 다음도 올 수 있다. 우리가 지나온 시절이 증명한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 시절을 품고, 이제는 남은 시간도 촌스럽도록 뜨겁게 사랑해 보자고.

조롱받는 영포티 청춘들에게. 오늘도 잘 버틴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