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보의 회상이 흘러나오던 1997년 겨울의 회상

IMF가 집 안으로 들어오던 날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분명 뜨거운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거리엔 활기가 있었고, 사람들은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호황의 바닥 어딘가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경상수지가 흔들리고, 나라 살림은 점점 팍팍해졌고, 불안은 뉴스의 문장 사이로 새어 나왔다.


1997년 여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강타한 외환 위기의 파도가 그해 가을 한국까지 밀려왔다. 연말로 갈수록 기업들이 흔들렸고, 일자리는 빠르게 줄었고,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결국 1997년 11월 21일,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나오면서 “큰일 났다”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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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파는 당장 우리 집에도 들이닥쳤다. 두 살 위 누나와 나는 대학생이었고, 세 살 아래 여동생은 우리 중 가장 똑똑했고 공부도 잘했다. 그래서 더 일찍, 더 열심히 학원과 과외를 하고 있었다. 각자 살길을 조금씩 바꿨다. 누나는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휴학하지 않고 버티기로 했다. 나는 영장이 나오자마자 휴학하고 군대로 갔다. 여동생은 과외를 그만두고, 영·수 중에서도 수학 학원 하나만 남겼다. 그때의 선택들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조정이었다.


군대라고 별수는 없었다. 외환위기의 그림자는 훈련소를 지나 자대까지 따라왔다. 고기반찬이 줄고, 그런 사소한 변화들이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나라가 어렵다”는 말이 뉴스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숟가락 끝에서 체감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때 나는 CC로 연애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입대 시기를 늦추면 안 되냐는 여자친구의 말도 있었지만, 나는 말을 뒤로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나 새 학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신입생 남자 후배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입대하자마자 훈련소부터 자대까지, 우리는 꽤 유명한 커플이었다. 편지는 수발병이 전달해 줄 때 한 번에 수십 통씩 쌓이기도 했고, 면회도 잦았고, 선물도 많이 왔다. 그러니 “고무신이 거꾸로 신어졌다”는 소식이 돌자 파장이 없을 리 없었다. 중대장부터 행보관까지 연일 면담이 이어졌고,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편지를 계속 보내오셨다. 선임들도 한동안 내 눈치를 봤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크게 무너지진 않았다. 입대하면 마음이 멀어지고, 어차피 끝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이미 어딘가에서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는 첫 정기휴가 때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간 그 장소에 그녀가 아니라, 헤어지자는 말을 전하러 온 다른 친구가 서 있었다. 그 순간, 마음이 한 번에 돌아섰다. 오히려 깔끔했다. 더 이상 붙잡을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 휴가 동안 부모님과 여행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복귀하는 마지막 날, 연락해서 “잘 살아”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한 선택 같다. 그 이후로 우리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다. 집안도 어려워졌고, 그 후배와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다 끝났고, 군에 있는 나에게 몸 쓸 짓을 했다면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읽고 나서도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접힌 마음은, 편지 한 장으로 다시 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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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오늘, 휴가 나온 장병이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문득 1997년의 내가 잠깐 떠올랐다. 그때 우연히 히트했던 터보의 ‘회상’을 들으며, 남몰래 메케한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다만, 그 눈물은 한 사람 때문만이 아니라, 나라의 분위기, 집안의 공기, 젊은 마음의 불안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눌러 만든 것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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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는 경제 뉴스로만 남지 않았다. 누군가의 꿈을 줄이고,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고, 누군가의 이별을 앞당기고, 누군가의 식탁에서 고기반찬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간 겨울의 감정은, 크리스마스 전날 같은 날에 문득, 아주 선명하게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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