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볼 권리, 고립된 속도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봄은 오직 '우리'에게만 허락된 것

매섭고도 시린 칼바람 속의 출근길은 유독 길고 서늘하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보도블록 위를 걷다 보면,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냉장고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자기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고개를 숙인 채 걷는다. 내 앞가림하기도 벅찬 세상에서 타인의 시린 손까지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사치처럼 느껴지니까.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각자도생의 골목에서 홀로 떨며 '언젠가는 봄이 오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살아간다.


릴케가 1898년의 어느 추운 날에 쓴 그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Will Dir den Frühling zeigen), Advent (1898)>


"​Nur die weit aus den kalten / Gassen zu Zweien gehn / Und sich bei den Händen halten – / Dürfen ihn einmal sehn."

"오직 차가운 골목들을 멀리 벗어나 둘이서 함께 걸으며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는 이들만이 그 봄을, 단 한 번은 볼 수 있도록 허락된다."


​여기서 눈에 밟히는 단어는 ‘허락’ 혹은 ‘자격’을 뜻하는 독일어 조동사‘Dürfen’이다. 릴케의

원문에서 구조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Nur die …

(오직 그런 이들만이)

Dürfen ihn einmal sehn.

(한 번은 볼 수 있다 / 보도록 허락된다)


여기서 Nur die와 Dürfen가 결합되면서, 봄은 보편적 자연 현상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허락되는 경험이 된다. 내 개인적인 해석으로, 릴케는 “누구나 언젠가는 봄을 맞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는 봄을 조건부로 허용되는 사건으로 설정한 것이다.


봄은 지구가 공전해서 얻어걸리는 계절이 아니라, 그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인간적인 온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일종의 특권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현실에서 무수한 사람의 생애와 마주하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혼자 똑똑해서 빛의 속도로 달려 나가는 사람은 결국 그 골목 끝에서 허무라는 벽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반면, 옆 사람의 보폭에 내 걸음을 맞추고 상대의 차가운 손마디를 기꺼이 움켜쥐며 걷는 이들은 결국 허무라는 골목을 빠져나간다. 효율로 따지면 비효율의 극치지만, 삶의 생존으로 따지면 이것이 모법답안은 되지 않을까?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 누군가의 손을 잡는 수고로움 속에 숨어 있다. 내 손이 시리면 상대의 손도 시리다. 그 자명한 사실을 인정하고 온기를 섞는 순간, 비로소 처절한 겨울의 냉기는 견딜 만한 온도가 된다.


지금 내 곁에 나란히 걷는 동료가 있는지. 혹은 내 속도에 지쳐 뒤처진 누군가가 있는지를 돌아보며 기꺼이 손을 내밀수 있는 것.


그들의 손을 잡는 건 동정이 아니라, 함께 봄에 닿기 위한 답이 될 수 있다. 릴케가 노래했듯, 봄은 오직 '우리'라는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만 그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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