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사와 삭제 사이에서,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
에드문트 후설은 현상학의 창시자로서 1916년부터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1919년부터 후설의 조교로 활동했으며, 후설의 적극적인 학문적 지원 속에서 학문적 명성을 쌓았다. 후설은 하이데거를 자신의 학문적 후계자로 공개적으로 인정했고, 그 결과 하이데거는 1928년 후설의 뒤를 이어 프라이부르크 대학 철학과 교수직을 계승했다. 1927년 출간된 『존재와 시간』 초판에는 후설에게 바치는 헌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문구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Edmund Husserl / in Verehrung und Freundschaft / zugeeignet / Todtnauberg i. bad. Schwarzwald. Zum 8. April 1926.” _ “에드문트 후설께 / 존경과 우정의 마음으로 / 바칩니다 / (토트나우베르크, 흑림. 1926년 4월 8일).”
그러나 1933년 독일 정치 상황의 급변은 두 사람의 관계와 학문적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 집권 직후 나치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사실은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Am 1. Mai 1933 trat Heidegger der NSDAP bei und wurde am 21. April 1933 zum Rektor der Universität Freiburg gewählt.” < Victor Farías, Heidegger and Nazism, Temple University Press, 1989. > _ “하이데거는 1933년 5월 1일 나치당에 입당했고, 1933년 4월 21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공무원 재건을 위한 법률」이 시행되어 유대인 출신 교수들이 대학과 공공기관에서 배제되었다. 유대인 출신이었던 에드문트 후설 역시 이 조치에 따라 도서관 이용권과 학문적 지위를 상실했다. 하이데거는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이 조치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후설을 옹호하지 않았다. 이후 『존재와 시간』의 재판 과정에서 초판에 실렸던 후설 헌사는 삭제되었다.
“Die Widmung an Edmund Husserl wurde in späteren Auflagen von Sein und Zeit entfernt.”
출처: Hugo Ott, Martin Heidegger: A Political Life, Basic Books, 1993. _ “에드문트 후설에게 바쳐진 『존재와 시간』의 헌사는 이후 판본들에서 삭제되었다.”
전후 하이데거는 자신의 나치 협력에 대해 명확한 공개 사과나 책임 인정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사후 공개된 사적 기록을 통해 더욱 분명해졌다. 2014년 이후 순차적으로 공개된 하이데거의 개인 노트인 검은 노트에는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시도와 반유대주의적 언급이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하이데거의 정치적 선택이 일시적 실수나 외적 압력의 산물이 아니라, 그의 사유 구조와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한다.
“Die Schwarzen Hefte zeigen, dass Heideggers Antisemitismus und seine Nähe zum Nationalsozialismus philosophisch motiviert waren.” < Peter Trawny, Heidegger und der Mythos der jüdischen Weltverschwörung, Klostermann, 2014.> _ “『검은 노트』는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와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근접성이 철학적으로 동기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논의는 단순한 연대기 정리를 넘어 규범적 질문으로 옮겨간다. 철학자는 ‘위대한 사상’만으로 평가되는가, 아니면 자신의 사유가 현실의 폭력과 결합될 때 도덕적으로도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이데거 옹호론은 대체로 “사유와 행위의 분리”를 강조한다. 즉 철학적 성취는 정치적 선택과 별개의 층위이며, 한 인간의 정치적 오류로 철학 전체를 재단하면 사유의 자율성을 손상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비판론은 철학이 단지 관념의 조립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 이해와 실천의 지평을 구성하는 만큼, 철학자가 사회적·정치적 폭력과 얽힐 때 “철학은 면책 특권을 갖지 않는다”라고 본다. 특히 ‘초판 헌사’가 보여주는 공개적 사제 관계와, 그 뒤의 침묵·삭제·사후 노트의 내용은 이 논쟁을 추상적 윤리 일반론이 아니라 구체적 행위의 연속성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 논쟁에 대해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응답했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였지만, 나치 전체주의를 분석한 정치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하이데거의 정치적 선택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철학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렌트에게 핵심 문제는 사유 그 자체보다 사유의 부재(thoughtlessness)였다. 그녀는 악이 반드시 악의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The trouble with Eichmann was precisely that so many were like him … that this new type of criminal was committed without evil intentions.” <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Viking Press, 1963. >_ “아이히만의 문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데 있었고… 이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악의적 의도 없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 있었다.”
이에 비해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보다 급진적인 윤리적 전회를 시도했다. 레비나스에게 철학의 출발점은 존재가 아니라 타자의 얼굴 앞에서의 책임이며, 존재론이 윤리를 압도할 때 사유는 폭력으로 기울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방향을 요약하는 표어로 널리 인용되는 문장이 “윤리는 제일철학이다”이며(레비나스 사유를 해설·정리하는 표준 참고문헌들도 이 핵심 논지를 Totality and Infinity의 문제의식과 연결해 설명한다), 그 취지는 “존재를 먼저 세우는 철학”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을 먼저 묻는 철학”이 우선한다는 데 놓인다.
“Ethics is first philosophy.”_ “윤리는 제일철학이다.
< 레비나스의 핵심 논지를 요약하는 표어로, Totality and Infinity 관련 해설 및 표준 개관에서 반복 확인된다.>
한편 자크 데리다는 단순한 단죄나 옹호를 모두 경계했다. 하이데거의 정치적 실패와 전후 침묵을 분명한 문제로 보면서도, “폐기”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기”가 책임의 한 형태가 된다고 주장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하이데거의 전후 침묵을 문제 삼는 대목은 다음처럼 남아 있다.
“He didn’t have to talk … but never anything about the Holocaust after 1945 … Not even an acknowledgement …” < “A Conversation with Jacques Derrida about Heidegger” (Oxford Literary Review 43.1, 2021에 수록된 대담 전사/번역본).> _ “그가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1945년 이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인정조차도…”
이 흐름을 다시 후설의 유산 보존 문제로 되돌리면 대비는 더욱 선명해진다. 나치 집권기 후설의 미출판 원고는 물리적 소멸의 위기에 놓였고, 이를 구조한 인물로 널리 확인되는 이는 벨기에 출신 프란치스코회 성직자 헤르만 레오 판 브레다였다. 후설 아카이브(루뱅) 측의 공식 소개는 판 브레다가 나치에 의한 파괴 위험 속에서 후설 원고를 “구출”했고 그 과정에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했음을 분명히 적고 있다.
“Herman Leo Van Breda … saved approximately 40,000 pages of Husserl’s manuscripts … from destruction at Nazi hands, risking his own life …” < KU Leuven, digitalHusserl / Husserl Archives 소개.>_ “헤르만 레오 판 브레다는 후설의 원고 약 4만 쪽을 나치의 파괴로부터 구해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후설의 후기 저작과 현상학의 전개는 ‘권력에 협력한 제자’의 선택이 아니라, 신변의 위험을 무릅쓴 외부인의 결단과 구조 행위가 만들어낸 조건 위에서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공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대비는 “철학자는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사유의 깊이만이 아니라 사유가 현실과 접속하는 지점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라는 문제로 다시 끌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