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곡빌딩 연대기

500년의 문중 터와 법조타운의 조우

서초동 법조타운을 걷다 보면 유리 벽으로 치장한 신축 빌딩들 사이에서 유독 묵직하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정곡빌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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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곳을 그저 법원 앞 목 좋은 변호사 사무실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이 건물의 기초 아래에는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 가문의 영욕과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정한 단면이 층층이 쌓여 있다.


본래 이 일대는 ‘정곡마을’이라 불리던 곳이다.

조선 초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정역 선생의 묘역과 사당이 자리 잡은 이래, 해주 정씨 문중이 500년 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집성촌이었다.


지금의 서울고등학교부터 대검찰청, 서리풀공원에 이르는 광활한 대지가 모두 그들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말, 국가의 강제 수용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500년의 시간은 무력하게 해체되었다. 사법 정의의 실현이라는 명분 아래 문중의 땅 위로 차가운 콘크리트 도로가 깔리고 법원과 검찰청이 들어섰다.


재미있는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가문의 터전을 내어준 보상금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지금의 정곡빌딩이다.

법을 집행하는 국가 기관 바로 앞에, 그 땅의 옛 주인이 건물을 세워 법률가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셈이다. 동관과 서관을 중심으로 여전히 문중의 자부심을 지탱하고 있는 이 건물은, 그래서 단순한 업무 공간 이상의 상징성을 갖는다.


물론 그 과정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말, 한국 사회를 뒤흔든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몰락은 이 건물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당시 문중의 어른이었던 그가 사업 확장을 위해 정곡빌딩을 담보로 제공하면서, IMF 외환위기의 파도 속에 건물이 경매로 넘어갈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가문의 자산이자 역사의 증거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사라질 뻔했던 그 순간은, 우리 현대사가 겪은 격랑의 축소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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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구하고도 단단한 서사가 흐르는 건물의 서관 206호.

그곳이 바로 나의 법률 사무원 인생이 시작된 출발점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법원의 권위적인 풍경과 대비되는, 기록 더미 속의 치열한 삶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매일 오가던 그 복도가 누군가에게는 500년을 지켜온 안마당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가문의 명운을 걸고 지켜내야 했던 최후의 보루였다는 사실을.


정곡빌딩은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벽면 위로 수많은 법률가가 오가고, 누군가의 인생이 걸린 사건들이 이곳에서 준비된다.


서초동 1572번지. 이곳은 단순한 주소지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 공익과 사익, 그리고 한 개인의 초심이 엉켜 흐르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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