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강의』— 일제의 억압을 뚫고 되살아난 민족어의 교과서
한 권의 오래된 책이 있다. 판권지를 펼치면 '단기 4279년 1월 30일'이라는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서기로 환산하면 1946년, 해방된 지 불과 5개월여 만이다. 그런데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은 그보다 21년 전인 1925년(단기 4258년)이다. 일제강점기 암흑기에 태어나 해방의 기쁨과 함께 다시 세상에 나온 이 책의 이름은 『국문강의(國文講義)』다.
국문강의 (1946년 조선정문회 발행, 작가 소장)
조선정문회(朝鮮正文會)에서 발행한 이 책은 단순한 국어 교재가 아니다. 우리말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선각자들의 치열한 기록이자, 총칼이 아닌 문자와 언어로 독립을 준비했던 '문화적 독립운동'의 증거물이다.
이 책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한힌샘'이라는 순우리말 호로 더 잘 알려진 대종교인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이다. 배재학당 재학 시절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의 교정을 맡으며 한글 연구에 몰두했던 주시경은 1896년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해 한글 맞춤법 표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가 1910년 발간한 『국어문법』은 현대 문법 체계를 개척하여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기본 이론이 되었으며, 1914년 유명을 달리한 뒤 그의 제자들이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를 결성해 스승의 뜻을 이어갔다.
또 한 사람은 리필수(李弼秀, 1887~?, 국문강의 기재대로 이필수가 아닌 리필수로 쓴다)다. 리필수는 1920년대 활동한 문법학자로 1922년 『선문통해(鮮文通解)』를, 1923년 『정음문전(正音文典)』을 간행했다. 주시경 학파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그는 1925년 조선정음부활회 이름으로 『글에 대한 문답』을 국한 혼용으로 간행한 뒤, 이를 순한글로 수정하여 1926년 조선정음회 명의로 재간했다. 이것이 바로 『국문강의』 초판과 재판이다. 흥미롭게도 대종교 기록에는 참교(參敎) 교질을 받은 리필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참교는 입교한 지 6개월 이상 된 교인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대종교의 첫 번째 품계다. 국어학자 리필수와 동일인인 듯하나, 결정적 연관 자료가 드러나지 않는다.
대종교인 리필수는 대종교 동지인 이연건(李鍊乾)과 이중건(李重乾)이 경상남도 함안(咸安)에 설립한 동명학교(東明學校)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동명학교의 교사진은 리필수·이중건·이연건 외에도 안영중·이희석·박종식·박건병·안재형·정기헌 등, 모두 대종교를 신봉하는 항일투사들이었다. 그러므로 동명학교는 대종교의 교리에 따라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과 민족의 우수성과 정통성을 널리 계도하는데 모범이 되었다. 특히 학교에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참배하면서 민족혼을 일깨우기도 했다. 후일 이 터를 ‘단군 한배 터'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필수를 비롯한 동명학교 교사들은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무저항 •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넘어,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보다 적극적인 항일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삼신일체의 천신(天神)께 조국독립을 기원하는 고천제를 올리고 조국독립을 맹세하며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주장했다. 리필수의 대종교 교력을 살피면 1915년 12월 12일 동명학교의 동지들인 이연건·이희석·정기헌 등과 참교(敎)의 교질을 받은 기록이 있다. 그의 대종교 입교가 그 이전으로 올라감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대종교와의 연관이 동명학교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시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대종교인 리필수와 국문강의의 국어학자 리필수를 같은 인물로 본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중광(重光)한 민족종교로, 단군을 교조로 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만주에 본거지를 두고 독립군 양성과 민족 교육에 힘썼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의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와 국어 운동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둘 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대종교는 종교 활동과 함께 종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했으며,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핵심 교육 내용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어학자 리필수가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교 품계를 받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문법 연구와 국어 보급이라는 학문적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대종교는 그러한 활동의 정신적·조직적 기반이었을 것이다.
『국문강의』의 판권지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초판 발행이 단기 4258년(1925년) 3월 30일, 재판이 단기 4259년(1926년) 4월 12~15일, 그리고 3판이 단기 4279년(1946년) 1월 30일이다. 21년의 세월 동안 이 책은 어떤 운명을 겪었을까?
『국문강의』 말미에 실린 '국문강좌' 안내문은 조선정문회의 활동 범위와 시대적 고난을 생생히 보여준다. 안내문에는 "금번 강습은 22주년을 맞이한다"는 문구와 함께, "일인(日本人)의 압박은 날로 심하여 부득이 중단되었었다"는 절절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정문회는 서울을 중심으로 대전, 공주, 강경, 전주, 군산, 광주, 목포, 제주(성내, 조천), 보성, 벌교, 순천, 대구, 마산, 개성, 해주, 안악 등 한반도 전역을 순회하며 국문 강습을 진행했다. 이는 단순한 문법 교육이 아니라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선 저항운동이었다. 1930년대 중후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극에 달하면서 조선어 사용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1942년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정점에 달한 해였다. 이 해 10월,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 단체'라는 죄목으로 대거 검거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 33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이윤재와 한징 두 사람이 옥사했다. 『조선말 큰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뒤인 1942년 11월 19일, 만주 영안현 동경성에서 대종교 총본사가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교주 윤세복 이하 25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 구성'이라는 죄목으로 검거되었다. 윤세복은 무기형을 선고받았고, 권상익, 이정, 안희제, 나정련, 김서종, 강철구, 오근태, 나정문, 이창언, 이재유 등 10명이 고문으로 옥사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들을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숭상한다.
두 사건을 연결하는 고리는 조선어학회 소속 국어학자 이극로였다. 이극로는 대종교 총본사의 천진전(天眞殿) 건립을 위해 윤세복에게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를 보냈는데, 일제는 교단 내부의 밀정을 통해 이를 압수하여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로 날조하고, 내용 중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부분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왜곡 번역했다.
조선어학회와 대종교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어학회에는 3·1 운동 참여자와 대종교 신자가 다수 있었으며,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자(이극로, 김법린), 신간회(장지영, 안재홍), 대한민국 임시정부(윤병호) 등 각종 민족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민족주의자들의 '소굴'로 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종교단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어학회는 대종교의 비밀결사단체인 ’귀일당‘요원들이 다수 참여하여 귀일당과 함께 대종교의 ’비밀결사단체‘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글 독립투쟁을 배후에서 지원하던 대종교 총본사는 임오교변으로 교단이 풍비박산 와해되다시피 했다. 일제는 1942년 두 달 사이에 조선어학회 사건과 임오교변을 연이어 일으켰는데, 이는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가장 장애가 되는 두 요소, 정신과 언어"를 동시에 제거하려는 계획적 탄압이었다. 이 시기 조선정문회의 활동 역시 중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재판 이후 20년간 재간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단순히 정치적 독립을 넘어 '언어의 주권'을 되찾는 의미였다. 해방 직후 출판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용지 부족, 인쇄 시설 부족, 자본 부족이 만연했지만, 우리말 교재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35년간 억눌렸던 조선어 교육의 열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국문강의』 판권지에 적힌 '임시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돈암정 263번지 6호'라는 표기는 당시의 긴박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식 사무소도 없이 임시 거처에서 서둘러 책을 복간했음을 알 수 있다. 인쇄는 같은 동대문구 돈암정 424의 130번지에 위치한 민중사 프린트부에서 이루어졌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단기 연호의 사용이다. 해방 직후 사용된 단기 4279년(1946년)이라는 표기는 일본의 연호(소화昭和)를 지워버리고 단군을 기원으로 한 우리 민족 고유의 연호를 되찾았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정치적 독립뿐만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주권의 회복을 상징한다.
책의 서언(序言)은 이 교재가 탄생한 배경을 명확히 밝힌다. "조선정문회에서 여러 사람이 회장 리필수 선생님과 문답한 것을 대강 기록한 것"이라는 문구는, 이 책이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간의 생생한 대화를 옮긴 실천적 교육서였음을 알려준다.
서언은 당시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토로한다.
"우리 인구가 삼천만인데 우리 글을 바로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의 현상은 과연 부끄럽습니다. 표준어가 없으며,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현실은 유감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목적을 이렇게 명시한다.
"밤낮으로 연구하시며 활동하신 우리 선생님의 말씀을 기록해 배포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우리 글을 연구하고 그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으로 끝맺는다.
"우리 말과 글은 개인의 것이 아니오니 여러분은 넓게 생각하시어 각각 자기의 주장을 막으시고 참된 진리로 나아가 속히 통일되기를 바랍니다.“
이 '통일'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국어 표기법과 문법의 통일을 의미한다. 당시 조선어 연구자들 사이에는 표기법을 둘러싼 논쟁이 분분했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조선정문회의 이 호소는 학문적 논쟁을 넘어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했던 시대적 요청이었다.
『국문강의』는 전문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 계몽서였다.
판권지 하단에 인쇄된 '국문강좌 제○회 청강권(聽講券)'은 이 책이 실제 강연 현장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이 책을 구입하고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강좌에 참석해 직접 배울 수 있었다.
표지에 찍힌 '국어정문협회(國語正文協會)'의 보라색 스탬프와 '한성시 화천정(漢城市 和泉町)' 주소, 그리고 '전화 광화문(3)-1884번'은 조선정문회가 해방 직후 조직을 재정비하며 명칭을 변경하거나 확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성'이라는 명칭은 경성(서울)의 과도기적 이름으로,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지우고 조선시대의 전통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리필수는 주시경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문자관을 발전시켰다. 학계에선는 리필수에 대해 "수십 년간 연구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자관을 세우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비판하며 한글 운용법을 변혁하려 했다"고 평가하면서도, "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성을 갖추지 못한 채 독특하고 개인적인 주장을 앞세웠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실제로 리필수는 1959년 『국문강의』 4판에서 "현행 맞춤법으로는 우리말을 바로 쓸 수 없으니 국어에 맞는 완전한 글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장음 표기법('ㅏ'의 장음을 'ㅏㅏ'로 표기) 등 급진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학계의 주류였던 조선어학회의 맞춤법 통일안과 배치되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이 리필수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평생을 바친 그의 열정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조선정문회가 전국을 순회하며 강습을 진행한 것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독립운동이었다.
조선정문회의 활동을 이해하려면 같은 시기 활동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1910년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최남선, 현채, 박은식 등이 중심이 되어 고전을 간행하고 민족 문화를 보존하려 했던 단체였다. 주시경도 조선광문회에서 국어 관련 고서를 교정하고 국어사전 편찬을 준비했다. 조선정문회는 조선광문회와 달리 고전 보존보다는 현대 국어 교육과 보급에 중점을 두었다. 두 단체는 목표는 달랐지만,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 언어와 문화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었다.
『국문강의』의 역사적 의의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제강점기 국어 운동의 기록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조선정문회가 전국을 돌며 진행한 국문 강습은 단순한 문법 교육이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문화운동이었다. "일인의 압박으로 부득이 중단되었다"는 기록은 일제가 우리말 사용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둘째, 해방 직후 언어 주권 회복의 상징이다. 1946년 1월, 해방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서둘러 복간된 이 책은 우리 민족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말과 글을 되찾는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임시주소에서 급히 인쇄된 이 책은 물질적 조건보다 정신적 가치를 우선했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셋째, 대중 계몽과 학문적 탐구의 결합이다. 『국문강의』는 전문가만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 서언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글을 연구하시는 분은 누구나 물론하고 한번 보아야만 될 줄로 생각"한다는 대목은, 이 책이 모든 조선 사람을 위한 교재였음을 말해준다. 청강권 제도를 통해 독자들이 강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지식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한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주시경, 리필수 같은 선각자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말을 지켰기 때문이다. 주시경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대종교의 그의 제자들은 조선어학회를 결성해 스승의 뜻을 이어갔다.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회원들을 투옥했지만, 그들은 해방 후 다시 모여 1947년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재개했다.
리필수는 생몰년이 명확하지 않을 만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국문강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를 관통한 국어 운동의 귀중한 증거다. 그는 학계 주류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평생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헌신했다.
『국문강의』는 단순한 문법책이 아니다. 이 책은 총칼이 아닌 문자로 독립을 꿈꾼 사람들의 기록이며, 언어가 곧 민족의 혼이라는 신념을 실천한 결과물이다. 판권지에 적힌 '단기 4279년'이라는 연호, '임시주소'라는 표기, 그리고 '속히 통일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절절한 호소는 모두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뜨거운 염원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작은 책이 지닌 큰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한글, 자유롭게 쓰는 우리말 뒤에는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국문강의』는 그들의 투쟁을 기억하게 하는 작지만 소중한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