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이라고 하면 보통 상사가 부하를 짓누르는 그림을 떠올린다.
직급을 앞세운 폭언,
불합리한 업무 지시,
공개적 망신 주기.
한국 사회에서 '갑질'은 권력의 위계를 상징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그런데 반대 방향도 있다.
부하가 상사를 괴롭히는 일.
업계에서는 '상향식 괴롭힘(upward bullying)'이라 부르고, 현장에서는 '을질'이라는 속어로 통한다.
정보를 고의로 숨기는 일부터 시작된다.
회의에서 필요한 자료가 느닷없이 사라지고, 공유했다던 메일은 발송 기록에 없다.
업무 지시는 은근히 무시되거나 지연되고, "몰랐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이런 미묘한 가스라이팅이 반복되면서 헛소문이 조직에 퍼진다.
"저 팀장 일 못한다더라", "윗선에 찍혔대".
따돌림은 점점 공고해지고, 불복종은 노골적으로 변한다.
타깃은 누구인가.
주로 윗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혔거나, 회사의 권력 표준에서 벗어난 상사들이다.
외부에서 영입된 관리자, 젊은 여성 팀장, 조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경력직.
공식 직급은 높지만 비공식 권력망에서는 약한 사람들. 결국 을질도 약자를 노린다.
조직 내 비공식 권력은 생각보다 강하다.
20년 버틴 선임 실무자는 누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어느 프로젝트가 어떻게 틀어졌는지 다 안다.
전문 기술을 독점한 직원은 그 사람 없이는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이들이 만드는 암묵적 연대는 때로 직급보다 강하다.
집단적 배제나 무시를 통한 압박은 공식 권한으로 막기 어렵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허위신고 피신고인 중 여성과 젊은 연령층의 비중이 높았다.
이들은 기존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의 가해자 집단과는 유의한 차이를 보였지만, 피해자 집단과는 차이가 없었다. 허위신고를 당한 피신고인들이 괴롭힘 피해자들과 유사한 피해 증상을 보인다는 점은, 상향식 괴롭힘도 엄연한 괴롭힘임을 뒷받침한다.
더 큰 문제는 구조적 은폐다.
직급상 상사라는 위치 때문에 피해를 호소하기 어렵다.
"팀원 하나 관리 못 하는 무능력한 관리자"로 낙인찍힐까 두렵다. 증거 확보도 까다롭다. 정보 은폐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헛소문은 출처가 모호하며, 미묘한 불복종은 녹음하거나 캡처할 수 없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후 노골적 폭언은 줄었지만, 업무 배제나 식사 따돌림 같은 교묘한 정서적 학대는 오히려 늘었다. 법은 명시적 행위는 잡아내도, 은밀한 공격은 포착하지 못한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2020년 5,823건에서 2024년 1만 2,253건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2024년 신고 건수 중 88%가 고용부 단계에서 '법 위반 없음' 판정을 받았다. 형사 기소까지 이어진 건은 100건 중 한 건도 안 됐다. 직장인 3명 중 1명이 괴롭힘을 경험한다고 답했지만, 실제 신고는 15.3%에 그쳤다. 나머지는 "대응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인사 불이익이 두려워서" 참았다.
상향식 괴롭힘도 마찬가지다.
신고율은 실제 발생률과 동떨어져 있다.
관리자가 부하 직원의 괴롭힘을 신고한다는 것 자체가 "리더십 부재"를 자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사측의 부적절한 대처도 문제를 키운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서유정 연구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상당수 회사는 만만하거나 입지가 취약한 직원들이 허위신고를 당하면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허위신고자 편을 든다. 반면 사업주나 임원 같은 고위직이 직원을 괴롭히면 피해자를 허위신고자로 몰거나 2차 가해를 가하면서 가해자를 옹호한다. 권력자를 보호하는 조직은 약자를 두 번 괴롭힌다.
괴롭힘의 본질은 권력 남용이다. 직급의 높낮이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 2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괴롭힘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는 직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문성, 근속연수, 조직 내 인맥, 업무 독점 등 모든 형태의 권력이 포함된다.
그러나 현행법은 예방보다 사후 대응에 방점이 찍혀 있다. 예방에 대해서는 취업규칙에 반영하라는 정도에 그치지만, 괴롭힘 발생 시 조사와 조치에 대해서는 상세한 규정을 둔다. 제도 자체가 구조적으로 사후 처리에 매몰돼 있다.
조직 차원의 사전 관리보다는 사건 발생 이후의 대응 능력에만 관심이 쏠린다. 괴로움을 겪는 상태를 조기에 해소하는 단계는 거의 없다. 고충 처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다 보니, 구성원들은 괴롭힘으로 신고해야만 절차가 시작되는 구조에 놓여 있다. 고충이 조기에 해결됐다면 괴롭힘 사건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사례가 상당수다.
예방 교육도 일회성에 머문다. 연 1회 온라인 강의 시청이나 간단한 테스트로 끝난다. 직장 내 성희롱 교육은 1년에 한 시간이 의무화돼 있지만, 괴롭힘 예방 교육은 그런 최소 기준조차 없다. 교육 내용도 괴롭힘의 정의와 금지 행위를 나열하는 수준이다. 실제 업무 현장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개입 대상인지에 대한 기준은 제시되지 않는다.
팀 내에서 특정 직원에게 업무가 과도하게 몰리고 공개적 질책이 반복되는 상황을 목격했을 때, 교육만으로는 어디까지가 개입 대상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동료가 먼저 나서야 하는지, 관리자가 나서야 하는지, 인사팀이 나서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괴롭힘을 막으려면 권력의 다층성을 인정해야 한다.
직급만 보면 상사지만, 실무 장악력으로 보면 부하가 더 강할 수 있다.
나이로는 후배지만, 조직 인맥으로는 선배가 더 약할 수 있다. 이 복잡한 권력 지형을 단순히 '갑과 을'로 나누는 순간, 우리는 절반의 괴롭힘을 놓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6년이 지났지만, 제도는 여전히 명시적 폭력에만 예민하다.
소리 없는 공격, 구조적 배제, 관계의 무기화는 법망을 빠져나간다.
상향식 괴롭힘은 그중에서도 가장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괴롭힘에 위아래는 없다. 있다면, 힘의 불균형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