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은 그런 곳이 아니다

나는 범죄학 및 범죄심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을 간신히 통과하면서 박사 과정은 포기했다. 미련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 길이 아님을 알았다. 그걸 아는 것도 사실은 대학원에 가봐야 알 수 있다.



대학원 밖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다. 학부 공부 몇 년 더 하면 학위를 받는 곳.


주변에 석사나 박사가 있어도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냥 오래 공부한 사람 정도로 본다. 석사는 그나마 기한 내에 학위를 따는 사람들이 많지만 박사는 기약 없는 나날의 연속이다. 박사 과정을 지켜보는 어떤 사람은 "거기서 뭘 그렇게 오래 해?"라고 묻는다. 악의 없는 질문이다. 그래서 더 답하기 힘들다. 모른다. 정말 모른다.


첫 학기 강의실에 앉으면 충격부터 온다. 교수가 당연하다는 듯 던지는 개념들이 낯설고, 옆에 앉은 동기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만 모르는 건지, 다들 모르는 척하는 건지도 분간이 안 된다. 그 불확실함 속에서 조용히 위축된다.


논문을 찾아서 읽기 시작하면 더 막막해진다. 읽어도 모르겠고, 모르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한 문단을 세 번 읽고 나서야 겨우 첫 문장의 의미가 잡힐 때, 그 무력감은 꽤 오래간다. 원서 논문은 말해 무엇하랴~


학부 때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일수록 이 충격이 더 크다. 그동안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표면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교수에게 지적사항을 들으면 그때부터는 자괴감이다. '내가 왜 여기 왔나'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을 자격이 있나'로 바뀐다. 지적의 내용보다 그 무게가 더 오래 남는다. 연구자에게 지적이란 단순한 오류 수정이 아니라 사고방식 전체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 때문이다. 버티는 사람이 결국 남는다. 그게 전부다.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막막함은 또 다른 종류가 된다. 뭔가를 발견해야 하는데, 뭘 발견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선행 연구를 읽으면 이미 다 연구된 것 같고, 내가 파고들 틈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미로 안에 있는데 출구가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느낌. 그 상태가 몇 달씩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박사도 아닌 석사일지라도 논문을 완성하고 졸업하는 선배를 보면 진심으로 경이롭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싶다. 그 사람이 특별히 천재여서가 아니다. 그 불확실함과 막막함을 그냥 견뎌낸 거다. 몇 년을. 그 무게를 알기 때문에 더 대단해 보인다.


요즘 AI에게 질문을 반복하면 전공자 수준의 지식이 생긴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AI는 정보를 꺼내준다. 빠르고 방대하다. 그런데 대학원에서 부서지는 건 정보 부족이 아니다.


모르는 걸 직면하는 훈련, 틀린 생각을 버리는 연습, 아무도 검증하지 않은 길을 혼자 걷는 경험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내성이다. 실패에 대한 면역 같은 것. 그건 대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AI가 틀린 게 아니다. AI는 도구다. 다만 도구를 많이 쓴다고 장인이 되는 건 아니다. 망치를 잘 다룬다고 건축가가 되지 않듯이.


회사도 마찬가지다. 조직은 구조적으로 대체 가능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없어져도 업무가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냉소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 구조 안에서 직업의식이란 맡은 일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다. 다만 그걸 연구와 혼동하면 안 된다.


직업의식으로 연구하면 전문가를 뛰어넘는다는 말이 있다. 동기가 강하면 결과도 다르다는 논리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동기를 수년간 유지하면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시간을 버티면서,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 그게 전문가 훈련의 실체다. 동기만으로는 그 버팀을 만들기 어렵다.


대학원을 다녀온 사람들이 굳이 그 고생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말해봐야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그 강의실에 앉아보고, 그 논문을 읽어보고, 그 지적을 받아봐야 안다. 그전까지는 그냥 오래 공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게 틀린 게 아니다. 그냥 모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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