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그만 때려도 됩니다

1,500억 달러를 가진 남자의 가장 싼 조언

누구에게나 한밤중에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면접에서 엉뚱한 대답을 했던 순간,
중요한 사람 앞에서 타이밍을 놓친 한마디,
돌이킬 수 없는 결정 하나.


그 기억은 수년이 지나도 선명하다.

이상한 건, 성공했던 기억보다 실패했던 기억이 훨씬 더 또렷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이라 부른다.

인간의 뇌는 좋은 경험보다 나쁜 경험에 더 강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생존에는 유리했겠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종종 발목을 잡는 기능이다.


과거의 실수를 곱씹으며 자신을 벌주는 행위-이것이 반성과 다른 점은, 거기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데 있다.


2025년 11월, 95세의 워런 버핏이 60년간 이끈 버크셔 해서웨이의 마지막 CEO 서한을 썼다.

투자 전략이나 시장 전망이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꺼낸 말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과거의 실수로 자신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조금이라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늦었다는 건 없습니다." — Warren Buffett, Berkshire Hathaway Thanksgiving Letter, November 10, 2025


1,50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사람이 남긴 마지막 조언치고는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평범함이 이 말의 무게다. 95년을 살아온 사람이 온갖 화려한 투자 격언 대신 꺼낸 말이 '자기 자신을 그만 때리라'는 것이라면, 거기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버핏의 말에는 미묘한 구분이 들어 있다.

'실수를 무시하라'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배우고(learn at least a little)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완벽하게 분석하라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라는 표현이 핵심이다.

실수에서 교훈 전부를 뽑아내야 한다는 강박 자체가 또 다른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걸 95년의 경험이 알고 있다. 실제로 버핏은 실수를 인정하는 데 거리낌이 없던 사람이다. 그의 2024년 연차보고서(2025년 2월 발표)에서 '실수(mistake)'와 '잘못(error)'이라는 단어를 20회나 사용했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의 서한을 합쳐도 16회였으니, 오히려 은퇴를 앞두고 실수에 대한 언급을 늘린 셈이다. 같은 기간 미국 대형 기업 CEO들의 서한에서 이 두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여기서 드러나는 역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로 불리는 사람이, 마지막 무대에서 가장 강조한 것이 자신의 '실수'였다는 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자 성과를 낸 사람이 정작 본인의 결론은 '나는 실수투성이였다'인 것이다. 이것은 겸손의 제스처가 아니다. 실수를 인정하되 거기 머물지 않는 것, 그것이 60년간 연평균 20%의 수익률을 만들어낸 태도의 본질이라는 고백이다.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2025년 출간한 Strong Ground에서 비슷한 맥락을 짚었다.

그녀는 아담 그랜트와의 대담에서 '최고의 리더는 아는 사람(knower)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learner)'이라고 했다. 자신이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순간, 성장은 멈춘다. 실수 앞에서 방어적으로 변하는 리더와, 실수를 재료 삼아 다음 판을 짜는 리더 사이의 차이는 결국 이 한 가지—배움에 대한 태도—로 갈린다.


버핏의 서한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문장이 있다.

"Choose your heroes very carefully and then emulate them. You will never be perfect, but you can always be better." _"영웅을 매우 신중하게 고르고, 그들을 본받으세요. 완벽해질 수는 없지만, 언제나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_ 같은 서한, 마지막 문단


이 말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버핏은 수십 년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왔다.


로저 로웬스타인의 전기 Buffett: The Making of An American Capitalist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The best thing I did was to choose the right heroes. It all comes from Graham." _"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것은 올바른 영웅을 고른 것이다. 모든 것은 그레이엄에서 시작됐다."


2024년 버크셔 해서웨이 연례 주주총회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을 했다.

"You want to have the right heroes, and you don't have to have them based on what they've accomplished. It's the people that you want to be yourself. If you copy the right people, you're off to a great start – and I don't mean a great start about making money; I mean a great start about living your life." _"올바른 영웅이 필요합니다. 꼭 그들의 업적 때문이 아니어도 됩니다.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면 됩니다. 올바른 사람을 따라 하면 좋은 출발을 하게 됩니다—돈을 버는 출발이 아니라, 인생을 사는 출발 말입니다."_ 2024 Berkshire Hathaway Annual Meeting (Benzinga, August 2, 2024 보도)


흥미로운 대목은 '업적 때문이 아니어도 된다'는 부분이다. 우리는 보통 성공한 사람, 유명한 사람, 돈 많은 사람을 롤모델로 삼는다.


버핏은 그 기준을 뒤집는다. 그가 말하는 영웅의 조건은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다. 업적이 아니라 태도와 인격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에게 첫 번째 영웅은 아버지 하워드 버핏이었고, 투자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이 뒤를 이었으며, 60년 넘게 곁을 지킨 찰리 멍거가 평생의 파트너였다.


마지막 서한에서 버핏은 또 한 명의 이름을 꺼냈다.

톰 머피(Thomas Murphy).


캐피털 시티즈/ABC의 전 CEO로, 2022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버핏은 '영웅을 찾을 때 톰 머피부터 시작하라. 그가 최고였다'고 썼다. 95세 노인이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를 영웅으로 부르는 장면. 거기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가 있다.

버핏의 이 서한에서 가장 개인적인 고백은 서두에 있다. '아마 다소 자기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One perhaps self-serving observation)'이라고 운을 뗀 뒤, 인생 후반부가 전반부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한 성공 자랑이 아니다. 버핏의 인생 전반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구토를 할 정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발표가 필요한 수업을 피했고, 군중 앞에 서지 않도록 인생을 설계했다. 데일 카네기 과정에 등록한 뒤에야 조금씩 그 공포를 극복했다.


후반전이 더 낫다는 고백 속에는, 전반전의 실패와 두려움과 시행착오가 켜켜이 깔려 있다. 버핏이 '늦었다는 건 없다(It is never too late to improve)'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늦게 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찰리 멍거를 만난 건 28세, 본격적으로 '가치 투자' 철학을 완성한 건 그보다 더 뒤의 일이었다. 자산의 99% 이상을 50대 이후에 번 사람이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다.


알프레드 노벨의 일화를 끌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형이 죽었을 때 신문사가 착각하고 노벨 본인의 부고를 실었다. '죽음의 상인'으로 기억될 뻔한 자기 인생을 본 노벨은 전재산으로 노벨상을 만들었다.


버핏은 이 이야기 뒤에 이렇게 썼다.

"Don't count on a newsroom mix-up: Decide what you would like your obituary to say and live the life to deserve it."_ "신문사의 실수를 기대하지 마세요. 당신의 부고 기사에 뭐라고 쓰이길 바라는지 정하고, 그에 걸맞게 사세요."


부고 기사를 거꾸로 써보라는 말. 끝에서부터 역산하라는 투자자의 사고방식이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먼저 정하고, 오늘의 행동을 그에 맞추라는 것이다.

버핏의 마지막 서한에서 의외의 문장이 하나 더 있다.

"Greatness does not come about through accumulating great amounts of money, great amounts of publicity or great power in government. When you help someone in any of thousands of ways, you help the world. Kindness is costless but also priceless." _"위대함은 돈, 명성, 권력을 쌓는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수천 가지 방법 중 하나로 도울 때, 당신은 세상을 돕는 겁니다. 친절은 비용이 들지 않지만,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1,500억 달러를 가진 사람이 '돈으로는 위대해질 수 없다'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의심부터 든다. 하지만 버핏의 행동이 이 말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는 2025년 마지막 서한과 함께 약 13억 달러(약 1조 9천억 원) 규모의 버크셔 주식을 네 개의 가족 재단에 기부했다. '기부 서약(The Giving Pledge)'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그는, 자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해 왔다.


그리고 서한의 마지막에 이 문장을 덧붙였다.

"Keep in mind that the cleaning lady is as much a human being as the Chairman."
_"청소하시는 분도 회장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이 한 줄이 어쩌면 서한 전체의 핵심일지 모른다. 실수를 인정하고, 영웅을 고르고, 부고를 거꾸로 쓰는 모든 과정의 밑바닥에는 결국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황금률(Golden Rule)—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버핏은 이것보다 더 좋은 삶의 지침은 없다고 단언했다.


버핏의 메시지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것이 보편적 지혜라는 관점이다. 실수에서 배우고, 좋은 사람을 따라 하고, 친절하게 사는 것. 누구에게나, 어떤 조건에서든 적용 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버핏이 이 서한에서 투자 이야기를 한 분량은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오마하의 어린 시절, 친구들,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였다. 95세 노인이 남긴 이 편지는 투자 서한이라기보다 한 인간의 유언에 가깝다.


다른 하나는 '생존자 편향'이라는 비판이다. 세계 10위 부자가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월세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늦지 않았다'는 말이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사실인가. 버핏 자신도 서한에서 인정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멍청한 행운(dumb luck)'이 결정적이었다고.

그리고 미국이라는 시스템이 '변덕스럽고 때로는 부패하게(capricious and sometimes venal)' 보상을 분배한다고.


이 두 관점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버핏의 조언이 '환경을 바꿔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불공정한 구조 속에서 개인의 태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환경에서든 태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기도 하다. 버핏의 말은 구조적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그 안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무기에 대한 이야기다.


서한의 가장 마지막 줄은 의외로 유머러스하다.

"I wish all who read this a very happy Thanksgiving. Yes, even the jerks; it's never too late to change." _"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 행복한 추수감사절을 빕니다. 네, 바보들에게도요. 변하기에 늦은 때란 없으니까."


60년간 주주들에게 편지를 쓴 사람의 마지막 유머. '바보들에게도' 축복을 보내면서 '변하기에 늦은 때란 없다'고 덧붙인다. 이 한 줄에 버핏이라는 사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독설과 위트, 겸손과 확신이 한 문장 안에 공존한다. 과거의 실수를 곱씹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완벽한 영웅은 없지만, 따라갈 만한 사람은 있다. 그리고 친절이라는 가장 비용이 낮은 행위가, 가끔은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95세의 노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잘 사는 비결'이 아니라 '괜찮다'는 한마디였다는 것.

그것이 이 서한의 진짜 가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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