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회사들 명함을 보면 예전 같지 않다.
사원·대리·과장 대신 '매니저'나 '프로'로 통일한 곳이 부쩍 늘었다. CJ가 2000년에 '님' 호칭을 도입한 이후,
삼성·두산·SK·HD현대·한화·효성까지 줄줄이 직급 간소화에 나섰다.
2025년 1월에는 보안기업 한싹이 5단계 직급을 없애고 관리자급 아래는 전부 '프로'로 바꿨고, 같은 해 3월에는 KT가 IT직군에 한해 기존 5단계를 '전임-선임-책임' 3단계로 줄였다.
처음 들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다.
수평적이고, 자유롭고, 소통이 빨라질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일해보면 안다.
달라진 건 명함뿐인 경우가 많다.
왜 이렇게 직급을 없애려 할까.
이유는 조직 구조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요즘 기업 현실을 보면, 신입 채용은 줄고 고연차는 안 나간다. 결과적으로 사원은 없는데 차장·부장만 남아 있는 조직이 생긴다. 5단계 결재 라인은 유지되는데, 실제로 일하는 실무자는 얼마 안 된다.
2020년 지방공기업 임금피크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132개 기관 중 71개(53.8%)가 임금피크제 대상자의 인건비 절감액으로 신규채용자 급여를 충당하지 못해 총 인건비 상승분을 끌어다 쓰고 있었다. 돈이 안 돈다는 얘기다. 회사 입장에선 이 구조 자체가 비효율이다.
전통적인 직급 체계에서는 2~3년에 한 번 진급이 있고, 진급하면 연봉 인상과 직급 수당이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이게 오랫동안 당연한 보상 시스템이었다.
문제는 회사의 성장률은 정체됐는데 인건비는 계속 오른다는 점이다. 특히 연공서열 기반의 호봉제는 근속 연수가 쌓일수록 임금이 올라가니까,
고령화된 조직일수록 인건비 부담이 커진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렇게 진단했다.
"연차만 쌓이면 급여가 올라가는 호봉제를 유지하는 대신 일종의 '임시처방'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공공 부문에도 성과·책임에 따라 임금이 달라지는 직무급제를 전면 도입해 합리적인 임금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경제, 2020.02.16)
그래서 나오는 선택이 있다.
"직급은 유지하되 역할만 늘리자", 혹은 "호칭은 통일하고 보상은 케이스별로 가자."
'
이 선택을 가장 예쁘게 포장하는 말이 '수평적 조직으로의 전환'이다.
솔직히 이 문장만큼 쓸모 있는 명분이 없다. 진급을 안 시켜도 되고, 연차 차이를 흐릴 수 있고, 보상 차등도 유연하게 가능하다. 외부에선 혁신적인 기업처럼 보인다. 운영·비용·브랜딩을 한 문장으로 다 잡는 셈이다.
2025년 5월 HR매거진에 실린 박형철 센터장의 분석은 이 점을 정확히 짚는다. 박형철 센터장은 머서코리아 한국대표와 삼정KPMG 부대표를 거쳐 현재 김앤장 법률사무소 매니지먼트&피플센터를 이끌고 있다.
"2020년을 기점으로 직급체계 개편을 시도하는 기업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직급개편의 주된 목적은 연공서열 체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건비당 생산성 감소를 줄이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 박형철, 김앤장 법률사무소 매니지먼트&피플센터 센터장 (HR매거진, 2025.05.07)
수평적 문화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비용 구조 조정의 수단인 셈이다.
더 날카로운 지적도 있다.
박형철 센터장은 같은 글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국내 기업들이 직급 통합과 호칭 통합 사이에서 혼선을 겪는 경우가 많다. 수평적이고 협력적 조직문화를 위해서는 직급 통합이 아니라 호칭 개선이 더 우선시돼야 한다. 반면 인건비당 생산성 효율화를 추구하는 경우 연공성을 약화시키는 직급 개편이 우선이다."
— 박형철, 김앤장 법률사무소 매니지먼트&피플센터 센터장 (HR매거진, 2025.05.07)
목적이 다르면 순서도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겉으론 "직급 없는 수평 조직"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의사결정은 여전히 위에서 내려온다.
책임은 아래로 흐른다.
역할은 늘어나는데 직급과 보상은 그대로다.
2023년 메트로서울 보도에 따르면, 삼성 계열사 직원 B 씨는 이렇게 말했다.
"20년을 일해도 호칭 변경이 없어 승진 동기 부여가 약해진 면이 있다."
— 삼성 계열사 직원 B 씨 (메트로서울, 2023.03.13)
같은 기사에서 익명을 요구한 전자업계 C 씨는 더 직접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회사가 지난달 호칭을 폐지하기 위해 내부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는데… 걱정을 표한 이유는 '연봉 인상' 기회를 줄이겠다는 의도가 보인다는 측면 때문이다."
— 전자업계 C 씨 (메트로서울, 2023.03.13)
왜 직급을 없애도 위계는 남는 걸까.
오승민 LG화학 러닝이노베이션 팀장은 한국경제 기고문에서 그 이유를 명쾌하게 짚었다.
"수평적인 조직문화의 핵심은 구성원들이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들의 이런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원들은 침묵하고 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조직 내에 만연해 있는 근거 없는 두려움(unfounded fear) 때문이다. 한국 속담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이 있다. 괜히 이야기를 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오승민, LG화학 러닝이노베이션 팀장 (한국경제, 2022.06.15)
침묵하는 두 번째 이유도 있다. '말해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구성원이 침묵하는 두 번째 이유는 '말해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조직 내 소통 채널을 통해 구성원의 다양한 의견을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 구성원이 조직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기는 힘들다. 조직의 리스닝 역량이 낮으면 결국 직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 오승민, LG화학 러닝이노베이션 팀장 (한국경제, 2022.06.15)
쉬운 예시를 들어보면 이렇다.
국내 대기업 회장이 사원들에게 의견을 자유롭게 말해보라고 하면, 사원들이 진짜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던가? 나중에 보복당할 수도 있으니 절대 자유롭게 말하지 못한다.
글로벌 HR컨설팅 기업 머서코리아의 분석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 일부 기업은 '사-대-과-차-부' 폐지 후, 다시 구성원들이 불편해하고 외부 고객응대에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다시 회귀하는 사례도 있다. 솔직히 그런 기업들이 지속성장하고 혁신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머서코리아 (Mercer Korea)
제도를 도입하고도 과거로 회귀하는 기업들은 공통된 실수를 범한다. 팀제라고 하면서 '무늬만 팀제'인 대팀제를 고수하는 경우다. 대팀제를 고수하면 팀 안에 자연스럽게 연공이나 위계가 유지된다.
위계와 연공이 유지되고, 관행대로 의사결정과 보고방식이 유지된다면, 아무리 조직구조를 수평화하고 직급단계를 축소해도 정착이 어렵다.
2023년 한국경제 기사는 직급 파괴 이후 기업들이 마주한 새로운 문제를 다뤘다.
"201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국내 직급제도의 키워드는 '직급 파괴'다. 그러나 초창기 직급 파괴를 시행한 기업들은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됐다. 직급이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조직 내 커리어 비전을 제시하는 기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수평적 문화 조성을 위해 축소된 직급단계는 구성원의 승진 기회 축소로 이어졌다. 한두 차례의 승진 후 정년까지 15년 이상을 같은 직급에서 보내야 하기에, 조직 내 성장 비전이 희미해졌다."
— 한국경제, 머서(Mercer)와 함께하는 HR 스토리 (2023.08.16)
직급을 없앴더니, 이번엔 성장 동기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그래서 일부 기업은 '레벨제'를 도입해 전문성 단계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보완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건 호칭이 아니다.
의사결정 권한이 실제로 분산됐는지, 성과에 따른 보상이 공정하게 작동하는지,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 환경인지가 본질이다. 이게 없으면 '수평적 조직'은 구호에 그친다.
한싹 인사 관계자는 2025년 1월 직급 폐지를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장 변화 속에서 기업 내부의 혁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직급 중심의 수직적 조직문화를 버리고, 전문성과 성과를 중시하는 유연한 조직으로 진화하겠다."
— 한싹 인사 관계자 (뉴시스, 2025.01.20)
말은 맞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다.
직급을 없앴다고 수평적이 되는 게 아니다.
위계가 없어져야 수평적이 된다. 그리고 위계는 호칭이 아니라 권한과 책임의 분배에서 나온다.
당신 회사에서 사라진 건 직급인가, 아니면 정말로 위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