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데 왜 제자리일까

AI 시대, 조직이 찾는 건 '판단하는 사람'이다

야근도 하고, 부탁도 안 거절하고, 맡은 일은 다 처리한다. 근데 인사철만 되면 늘 비슷한 자리다. 옆자리 동기는 벌써 두 번째 승진인데, 나는 아직도 여기다. "내가 뭘 잘못했지?" 싶지만 딱히 답이 안 나온다. 성실함은 조건이지 차별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은 "얼마나 많이 했나"보다 "뭘 판단했나"를 본다.


7년 차 대리 K 씨. 회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한다.

팀 회식 때 상사들이 "K 대리 없으면 우리 팀 안 돌아간다"라고 칭찬한다.

그런데 승진 명단에는 늘 빠진다. K 씨는 억울하다. "저보다 일 적게 하는 사람도 과장 됐는데, 저는 왜 안 되는 거죠?" 상사에게 물어봤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자네는 일은 잘하는데, 왜 그렇게 했는지를 설명 못하더라고. 보고서는 깔끔한데 판단 근거가 안 보여."


이런 사람들한테 공통점이 있다.

일은 설명할 수 있는데, 판단은 말 못 한다.


예를 들어보자. 마케팅팀 회의에서 상사가 묻는다.

"이번 캠페인 타깃을 왜 2030으로 잡았지?"

A과장은 이렇게 답한다. "데이터 보니까 2030 전환율이 높아서요."

B과장은 다르게 답한다. "처음엔 3040도 고려했는데, 구매 단가는 높지만 신규 유입이 정체 상태였습니다. 반면 2030은 전환율이 12% 높고, SNS 확산력까지 고려하면 장기 브랜딩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리스크는 구매력인데, 이건 할부 옵션으로 보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둘 다 같은 결론이다.

하지만 B과장은 '왜 이 선택이 최선인지', '다른 가능성은 뭐였는지', '위험 요소를 어떻게 읽었는지'를 말한다. 이게 판단력이다. 보고는 깔끔한데 사고의 흔적이 안 보이면, 상사는 신뢰를 주저한다.

"얘가 진짜 생각하고 한 건가, 아니면 그냥 데이터 따라한 건가?" 의심하게 된다.


2025년 들어 여러 기업의 인사 기준을 보면 한 가지 패턴이 뚜렷하다.


보령은 2025년 12월 임원 승진 인사에서 "핵심 사업의 실행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문성과 현장 경험을 갖춘 인재 중심"이라고 밝혔다. 특히 영업부문장 정웅제 부사장은 "시장 변화 대응과 조직 실행력을 바탕으로 성과를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순히 매출을 올린 게 아니라, 어떻게 시장을 읽고 대응했는지가 승진 사유였다.


삼성물산은 2024년 12월 발표한 2025년 임원 인사에서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추진력과 전문성을 갖추고 미래 성장을 리드할 수 있는 인재"를 발탁했다고 밝혔다. 여기서도 키워드는 '추진력'과 '전문성'이다. 일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한국앤컴퍼니그룹은 2025년 12월 인사에서 "단기 실적보다는 중장기 경쟁력 확보와 리스크 관리에 무게를 둔 인사"라고 설명했다. 승진 기준으로 "검증된 전문성, R&D 역량, 현장 대응 능력"을 제시했다.


경상남도는 2025년 6월 정기 인사에서 "성과 중심 승진 인사와 정책 실행력 확보"를 강조했다.

승진자들은 "인구정책 단계적 고도화", "가야고분군 통합관리기구 유치", "남해안권 발전가속화" 같은 구체적 성과를 냈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무엇을 했나'가 아니라 '어떤 판단으로 그 성과를 냈나'다.


패턴이 보이는가? 실행만으로는 부족하다. 특정 영역에서 판단력을 입증한 사람이 올라간다.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가 2025년 발표한 '2030 직장인의 리더 인식 기획조사'에 따르면, 중간관리자 직책을 희망하는 직장인은 36.7%에 불과했다. 반면 리더 직책을 원하지 않는 비율은 32.5%로 3명 중 1명꼴이었다. 임원을 맡고 싶지 않다는 비율은 39.2%에 달했다.


왜일까? 책임은 늘고, 권한은 애매하고, 성과 압박은 커지는데 보상은 그만큼 안 따라온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직장인이 "차라리 실무자로 남겠다"라고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건 기회다. 승진 의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차별화 포인트가 되는 시대다. 여기에 판단력까지 갖추면? 희소성은 더 올라간다.


아마존 CEO 앤디 재시는 2025년 6월 17일 직원 메모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성형 AI와 AI 기반 소프트웨어 에이전트는 업무처리 방식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오늘날 수행되는 일부 업무에는 더 적은 인력이, 다른 유형의 업무에는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포브스코리아가 2026년 1월 발표한 'AI 트렌드 보고서'는 더 구체적이다.


"2026년에는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AI를 업무에 접목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출 전망이다. 단순히 기술을 조작하는 능력에서 벗어나 AI가 만들어낸 결과를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기업은 AI 활용을 전제로 구성원의 직무를 다시 설계하고 그들의 판단력과 창의성을 확장할 방법을 모색할 전망이다. 특히 AI가 생성한 수많은 결과물 가운데 기업 철학에 부합하는 것을 선택하는 판단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행은 이제 도구가 한다. ChatGPT에게 "경쟁사 분석 보고서 써줘"라고 하면 5분 만에 A4 10장짜리가 나온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보고서가 우리 상황에 맞는지, 어떤 전제가 깔려 있는지, 어느 부분을 신뢰하고 어느 부분을 의심해야 하는지 — 이걸 판단하는 건 사람이다.


남는 평가 기준은 판단의 깊이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만 기억하자.


1. 보고서에 '판단 근거' 섹션을 넣어라

기획안이든 결과 보고든, 맨 뒤에 한 문단만 추가하면 된다.

"이 방안을 선택한 이유: A안(기존 방식)은 안정적이지만 시장 변화 대응이 느림. C안(정말 새로운 방식)은 효과는 크지만 리스크가 높음. B안은 둘의 중간으로,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면서도 점진적 혁신이 가능해 현시점에 최적이라고 판단함."

이것만으로도 상사는 "얘가 생각하고 한 거구나"라고 느낀다.


2. 회의에서 대안을 함께 말하라

제안할 때 하나만 말하지 마라. "A안을 제안합니다. B안도 고려했는데, 리스크가 커서 제외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판단하는 사람'이 된다.


3. 실패를 분석하라

프로젝트가 잘 안 됐을 때가 오히려 기회다. "왜 안 됐나요?"라는 질문에 "시장이 안 좋아서요"라고 답하면 끝이다. 대신 이렇게 말해보자. "초기에 A 전략으로 갔는데, 3주 차에 전환율이 예상치의 60% 수준이었습니다. 원인을 분석해 보니 타깃 연령대가 잘못 설정된 것으로 보여 B 전략으로 피봇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목표는 달성 못했지만, 다음번엔 초기 가설 검증 기간을 2주에서 1주로 줄여 빠르게 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패해도 사고의 흔적을 보여주면, 상사는 당신을 신뢰한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K 대리는 여전히 야근 중이다.

하지만 이제는 보고서 마지막에 "판단 근거" 한 문단을 넣는다.

회의에서 제안할 때 "A안도 고려했지만 이런 이유로 B안을 선택했습니다"라고 말한다.


6개월 뒤 K 대리는 과장 승진 후보자 명단에 올랐다.

상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K 과장 보고 들으면, '얘가 진짜 고민했구나' 싶더라고."


성실한데 제자리라면,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사고를 드러내지 못한 결과다.

AI가 실행을 대신하는 시대, 조직이 찾는 건 '판단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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