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쿠르드족, 수니와 시아, 나치의 유산, 중동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지도

중동 뉴스를 보다 보면 이름들이 쏟아진다. 쿠르드족, ISIS, 헤즈볼라, 후티, IMEC, 수니파, 시아파. 그런데 이 이름들을 하나의 지도 위에 겹쳐 놓으면, 이상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 배신의 구조가 반복된다는 것. 그리고 그 뿌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됐다.


1. 나라 없는 민족 — 쿠르드족의 100년


쿠르드족은 쿠르드어를 쓰는 단일 민족 집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약 3,000만~4,500만 명이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네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중 절반 가까이가 터키에 있다. 이란에 800만~1,100만 명, 이라크에 400만~650만 명, 시리아에 200만~300만 명. 중동에서 아랍인, 터키인, 페르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민족인데, 자기 나라가 없다. '지구의 미아'라는 별명은 과장이 아니다.


원래 이들은 오스만 제국 치하의 쿠르디스탄에 모여 살았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영국이 접근했다. 제안은 간단했다. 오스만과 싸워라. 대신 독립 국가를 세워주겠다. 쿠르드족은 전장에 나갔다. 전쟁이 끝났다. 영국은 약속을 잊었다.


1920년 세브르 조약에는 쿠르드 자치 조항이 명시됐다. 3년 후 1923년 로잔 조약에서 그 조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쿠르드의 거주지는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로 잘렸다. 선이 그어진 것이다—총도 아니고, 강화 조약 협상 테이블 위에서.


독립이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석유다. 쿠르드족의 거주 지역 아래 대규모 유전이 있다. 이라크 쿠르드 지역(KRI)만 해도 키르쿠크 유전 매장량이 90억 배럴에 달한다. 2014~2023년 사이 이 지역에서는 하루 45만 배럴의 원유가 터키 방향으로 수출됐다. 옥스퍼드 에너지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쿠르드 석유의 개발과 수출 여부는 이 지역의 독립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좌우한다.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중 어느 나라도 그 땅을 떼어줄 동기가 없다. 독립을 허용하는 순간 자국의 대형 유전 상당수가 타국 영토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100년 동안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다.


2025년 9월, 이라크 중앙정부(바그다드)와 쿠르드 자치정부(에르빌) 사이에 겨우 석유 수출 합의가 다시 이뤄졌다. 하지만 걸프국제포럼(Gulf International Forum)의 최신 분석은 이를 "임시방편"으로 규정한다. 터키가 중재 판정금 15억 달러를 아직 지불하지 않았고, 국제 석유회사들의 미수금 문제도 미결 상태다. 합의는 됐지만 신뢰는 회복되지 않았다.


2. 회랑 전쟁 — IMEC와 이란의 꿈


이란이 중동에서 오랫동안 원하는 것이 있다. 지중해로 나가는 통로다. 이라크 쿠르드 지역을 거쳐 시리아의 라타키아 항구까지 이어지는 육상 경로—그게 안정되면 이란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 에너지와 물자가 움직일 수 있다. 2024년에 취임한 이란 대통령 페제시키안이 첫 해외 방문지로 이라크 쿠르드 지역을 택한 것은 그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반대편에는 IMEC(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이 있다. 2023년 9월 G20 뉴델리 정상회담에서 미국, 인도, UAE, 사우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EU가 MOU를 체결하면서 공개된 프로젝트다. 인도에서 선박으로 UAE 두바이까지, 다시 철도로 사우디·요르단·이스라엘을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루트다. 완성 시 아시아-유럽 간 운송 시간을 현재 대비 40% 단축하고, 연간 약 54억 달러의 물류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도 나왔다.


이 회랑이 완성되면 타격을 받는 곳이 있다. 수에즈 운하, 이란-이라크-시리아 노선, 중국의 일대일로. 트럼프는 2025년 2월 모디 인도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IMEC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역 루트 중 하나"로 직접 치켜세웠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연결해야 한다는 치명적 전제가 있다. 가자 전쟁이 사우디-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사우디-이스라엘 구간 철도는 아직 종이 위에만 있다. 아틀란틱카운슬의 2025년 8월 보고서는 IMEC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분산된 다자 거버넌스 구조가 현실화의 가장 큰 장애"라고 지적한다. 인도-미국 무역 갈등과 트럼프의 관세 정책도 변수다. TRENDS 리서치는 2025~2026년을 '재설정 국면'으로 규정하면서, 단계적 접근 없이는 전면 가동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2026년 1월 EU-인도 무역협정이 체결되면서 다시 추진 동력이 붙긴 했다. 다만 쿠르드 문제가 해결되면 이란의 지중해 통로가 안정된다. 그게 IMEC 참여국들에게는 불리하다. 그래서 IMEC 관련국들은 쿠르드 독립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쿠르드족을 독립시켜 주고 싶지 않으면서, 동시에 쿠르드족을 이용하고 싶은 세력은 계속 나타난다.


3. 배신의 현대사 — ISIS, 트럼프, 그리고 또 다른 약속

시리아 내전이 길어지면서 반군 중 가장 강경한 수니파 세력이 ISIS를 선포했다. ISIS의 자금줄 중 하나는 쿠르드족이 관리하는 유전 지대였다. 점령하면 돈이 된다. 그래서 점령했다.


쿠르드족은 ISIS를 막을 이유가 충분했다. 싸웠다. 그런데 전쟁은 공중 폭격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상군이 필요하다. 트럼프 1기가 등장했다. 쿠르드 지상군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전면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제 무기로 무장한 쿠르드 페슈메르가가 ISIS를 제압했다.


ISIS가 소멸 수순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트럼프는 터키와 쿠르드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NATO 동맹국 터키가 쿠르드 독립을 가장 강하게 반대한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2019년 시리아 북부에서 미군이 철수했고, 터키가 쿠르드 지역을 공습했다. 당시 미 국방장관 매티스가 이 결정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그게 얼마나 명백한 배신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2024년 말, 시리아 반군이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렸다. 반군의 핵심 조직 HTS는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장 출신인 알 졸라니가 이끄는 조직이다. HTS를 지원한 것은 터키의 에르도안이다. 터키의 목표는 쿠르드 독립운동을 견제하는 것이다.


이란이 약해지는 기색을 보이자 쿠르드 반군 세력이 이란 서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025년 말부터 2026년 초, 이란 서부 쿠르드 밀집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됐다. 트럼프는 이란 쿠르드 반군 지도자들과 통화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쿠르드족은 배신당한 경험이 무수하다. 트럼프도 그 목록에 있다. 그래도 미제 무기와 정보는 탐난다. 현실적인 판단이다. 트럼프 입장에서 쿠르드족은 이란을 흔드는 수단으로 충분히 쓸모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알면서도 이용한다. 그리고 또 배신한다.


4. 1,400년 전의 싸움 — 수니와 시아


중동의 현재를 이해하려면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함마드는 40세에 동굴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선포했고, 그로부터 20년간 코란을 완성했다. 632년 그가 61세에 고열로 사망했다. 문제는 후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측근들과 처가 쪽 세력은 선출로 후계자를 정하자고 했다. 본가, 즉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중심으로 한 혈통은 당연히 알리가 계승해야 한다고 맞섰다.


처가가 이겼다. 1대 칼리파는 아이샤의 아버지 아부 바크르였다. 2대, 3대도 수니파 쪽에서 나왔다. 4대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리가 칼리파가 됐다. 곧 암살당했다. 알리의 아들 후세인은 680년 카르발라 전투에서 수니파 우마이야 칼리프 야지드의 군대에게 살해됐다.


이것이 시아파와 수니파가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맞은 순간이다. 미국 외교협회(CFR)는 이 사건을 두고 "정치적 분열이 혈투로 각인된 전환점"이라고 규정한다. 시아파 최대 축제 '아슈라'는 이때 후세인이 당한 고통을 잊지 말자는 추모 행사다. 신도들이 스스로 피가 나도록 자기 몸을 때린다. 수니파에게 후세인이 살해당한 것을 1,400년 동안 기리는 집단과 친해지기는 쉽지 않다.


전 세계 이슬람교도의 85~87%가 수니파이고, 13~14%가 시아파다. 이란이 시아파 종주국이고, 사우디가 수니파 종주국이다. 두 나라가 양숙인 이유가 여기 있다.


흥미로운 건 이스라엘-이란 관계다. 시아파인 이란이 이스라엘과 원수일 이유는 원래 없었다. 이스라엘이 괴롭히는 팔레스타인은 수니파다. 팔레비 왕조 때까지는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이걸 바꾼 건 역설적으로 나치 독일이었다.


5. 나치가 심어놓은 씨앗 — 페르시아가 이란이 된 이유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영국은 페르시아(이란)를 식민 지배하며 자원을 착취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영국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해 영국의 주요 자원 공급선을 끊어버렸다. 페르시아만이 남은 대안이었다. 수탈은 더 심해졌다.


그때 나치 독일이 접근했다. 나치 외교의 제1원칙은 민족이었다. 그들이 족보를 뒤져 내린 결론—아리아족의 원조가 바로 페르시아라는 것. 나치는 1939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제국과 이란의 아리아 문명 간의 동족 관계를 이란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7,500여 권의 책을 선별해 이란에 보내는 '독일 과학 도서관'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나치 선전 라디오 방송 '제젠(Radio Zeesen)'은 파르시어 방송을 통해 이란인들에게 아리아 혈통의 자부심을 심었다. 심지어 히틀러가 12이맘(시아파의 메시아)으로 돌아왔다는 선전도 방송됐다.


국명 변경은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1935년 레자 샤는 국제사회에 '페르시아' 대신 '이란'으로 부를 것을 공식 요청했다. '이란'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대 페르시아어 'Aryānām Xšaθra(아리안의 땅)'에서 유래했다. 이 명칭 변경이 나치 외교의 제안에서 비롯됐다는 기록이 있다. 예일대학교 출판부의 연구에 따르면 "베를린 주재 이란 대사관이 나치의 영향을 받아 국왕에게 국명 변경을 건의했다"는 당대 외교 문서가 존재한다. 단,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 결정이 순전한 나치 영합인지, 이란 고유의 민족주의 회복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다. '이란'이라는 이름은 나치가 등장하기 수천 년 전부터 내부적으로 사용됐고, 레자 샤의 근대화 개혁이 케말리즘(터키 세속주의)을 모델로 삼았다는 점도 사실이다. 다만 나치가 이 결정을 적극 지지하고 활용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936년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 인종법에서 이란인을 아리안으로 공식 인정해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1939~1941년, 이란 전체 수입의 절반 가까이, 수출의 42%가 독일과 이뤄졌다. 독일 기업들이 이란 철도와 공장을 지었고, 독일 고문관들이 군대를 훈련했다.


1941년 8월, 영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이 이란을 통해 소련 바쿠 유전과 인도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립국 이란을 전격 침공했다. 레자 샤는 강제 퇴위당했다.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졌다. 하지만 이란 민심에 심어진 반영(反英) 정서와 반유대 편견은 지워지지 않았다. 팔레비 국왕과 엘리트들은 미국 눈치를 보며 이스라엘 편을 들었지만 민심은 달랐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가 집권하면서, 그는 바닥 민심을 따라 미국을 '큰 사탄',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으로 선언하고 외교 관계를 끊어버렸다. 영국 식민 지배에 대한 반감과 나치가 심어놓은 반유대 정서가 합류해 이슬람 혁명의 이념적 연료가 된 것이다.


6. 저항의 축 — 헤즈볼라, 후티, 그리고 예멘의 전쟁


이란의 가장 큰 숙제는 주변 대부분 나라들이 수니파라는 사실이다. 시아파 종주국이 영향력을 뻗으려면, 시아파 세력이 자리 잡은 곳을 찾아야 한다. 그중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레바논이다.


레바논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 나라의 핵심 세력이 헤즈볼라—1982년 이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시아파 무장 조직이다. 이스라엘과 피 터지게 폭탄을 주고받는 레바논이 이란의 맨 앞 진지인 것이다. 이란이 헤즈볼라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스라엘은 이란을 상종 못 할 악의 축으로 보게 됐다.


남쪽에는 예멘이 있다. 후티 반군이 주목받은 것은 2014~2015년이다. 예멘 북부 산악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자이드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조직은, 2014년 9월 수도 사나를 장악하고 2015년 1월 대통령궁까지 접수했다. 수니파 하디 정부는 남쪽 아덴으로 쫓겨났다.


후티는 자이드 파다. 시아파의 분파인데, 이란이 속한 12 이맘파와는 다르다. 5번째 이맘인 자이드 이븐 알리를 따르는 계파다. 자이드 파가 5번째 이맘을 믿는 이유는, 자이드가 전투력이 가장 강했던 이맘이기 때문이다. 예멘 인구의 약 35%가 자이드 파다.


이란과 후티의 관계는 종파 동일성보다 이해관계의 일치에서 시작됐다. 학술지 『Defense & Security Analysis』에 2025년 6월 게재된 논문은 "후티가 헤즈볼라를 모델로 조직을 구성했고, 이란과 반이스라엘·반미 성향을 공유하지만, 호메이니의 '벨라야트 에파키흐(최고 성직자 통치)'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후티를 '프록시'보다 '파트너'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결론 내린다. 실제로 이란이 후티에 본격적인 군사 지원을 시작한 것은 2014년 사나 함락 이후부터다.


예멘 정부군을 사우디와 UAE가 지원하고, 후티를 이란이 지원한다. 표면상 내전이지만 실질은 수니파 사우디와 시아파 이란의 대리전이다. 예멘의 수니파-시아파 비율이 팽팽한 것이 오히려 싸움을 더 격렬하게 만들었다. 한쪽이 압도하면 싸움은 싱겁다. 팽팽할 때 더 치열해지는 법이다.


이란은 헤즈볼라, 후티, (아사드 정권 붕괴 전까지의) 시리아 정부군을 묶어 '저항의 축'이라 부른다. 채텀하우스가 2025년 3월 발간한 연구 보고서 『저항의 축은 어떻게 형성되고 진화했는가』는 이 연대의 핵심을 짚는다. 후티는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을 향한 탄도 미사일 공격에서 대함 탄도 미사일(ASBM)을 처음 사용한 축 구성원이 됐다. 홍해를 지나는 상업 선박을 공격하며 글로벌 물류를 뒤흔들었다. 채텀하우스 보고서는 "후티와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들은 7·10 이후 이란의 지시보다 더 앞서 나가는 독립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라고 지적한다. 조직이 '이란의 프록시'에서 '자율적 행위자'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란이 이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치른 비용도 크다. 2024년 10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헤즈볼라 최고 지도부가 사실상 궤멸됐고,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란의 지중해 통로가 끊겼다. 그럼에도 이란은 2025년 7월까지 후티와 헤즈볼라에 무기 공급을 이어갔다. 세기 인터내셔널(Century International)의 2025년 4월 보고서는 "저항의 축은 지역 전쟁을 조율하는 데 실패했지만, 각 구성원의 로컬 권력 기반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판단한다.


지도 위에 선을 긋는 자들


쿠르드족의 이야기, 이란의 지중해 통로, IMEC, 수니와 시아의 1,400년 전쟁, 나치가 심어놓은 감정의 씨앗, 예멘의 대리전. 이것들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하나의 공통된 구조가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약속한다. 이용한다. 버린다. 버려진 자는 다음에 또 다른 강한 자의 약속을 받아들인다. 달리 선택지가 없으니까.


지도 위의 선 하나가 수천만 명의 삶을 결정한다. 그 선은 총이 아니라 협상 테이블에서 그어진다. 영국이 1923년 로잔에서 그었고, 나치가 1935년 '이란'이라는 이름을 제안했고, 트럼프가 2019년 철군 명령서에 서명했다. 그 선들은 모두 지금도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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