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9차 당대회 선언

영구 분단의 제도화와 이재명 정부의 선택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의 입장에서, 이번 북한의 9차 당대외 선언에 대해 내-외신 자료등을 검토한 후 복기해 본다.


2026년 2월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제9차 당대회 폐막 열병식에서 김정은 총비서가 역사적 선언을 했다. "한국을 동족이라는 범주에서 영구히 배제"하겠다는 것, 이재명 정부의 유화 제스처는 "기만극이자 졸작"이라는 것,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분단 노선을 "국가의 결론적 강령"으로 확정한다는 것. 반면 미국에 대해서는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적대시정책을 철회한다면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며 대화의 문을 미국에게만 선별적으로 열어두었다.


냉정하게 진단해야 한다. 이것은 엄포가 아니다.


1. 전략적 선언의 세 층위


북한의 이번 선언은 최소한 세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적 전략 선택이다. 첫째는 군사전략 노선의 확정이다. 북한은 2023년 9월 최고인민회의 개헌을 통해 핵무력 정책을 헌법 본문에 명기했고, 이번 당대회에서 이를 재차 "국가의 불변 의지"로 못 박았다. 핵을 체제 보존의 유일한 보증으로 확신하는 이상, 통일 담론은 핵 사용 명분의 정합성을 해치는 부담이 된다. 남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해야만 핵 사용의 논리가 완성된다.


둘째는 대미 외교 전략의 재편이다. 김정은은 한국을 협상에서 배제하고 미국과의 직거래(Direct Deal)를 전면화하려 한다. 과거 하노이 노딜(2019) 이후 김정은이 학습한 교훈은 명확하다. 제재 해제든, 핵 군축이든, 평화협정이든, 한국이 아닌 워싱턴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 방정식에서 "하위 행위자"일 뿐이다.


셋째는 내부 통치 구조의 안정화다. 적대 담론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북한 체제 내부의 인식 관리 전략이다. K-드라마와 K-문화의 유입이 북한 주민들의 체제 이탈 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을 평양은 너무 잘 안다. 외부의 적이 명확할수록 내부 결속은 강화되고, 통제의 명분은 정당성을 얻는다. 김정은에게 적대 담론은 통치 기술이다.


2. 왜 지금인가 — 전략적 자신감의 다섯 원천


북한의 이번 선언이 공허한 위협이 아닌 이유는 그 배경에 실질적인 전략적 자신감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① 북러 혈맹의 성숙

가장 결정적인 변수다. 김정은과 푸틴은 2024년 6월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했고, 북한군 약 1만 2천 명이 쿠르스크 전선에 파병되었다. 이 파병의 대가로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최신 무기체계, 정찰위성 기술, 나아가 ICBM 다탄두화·대기권 재진입 기술이전 가능성까지 열어가고 있다. 아산정책연구원 등 국내 전문기관들이 일치하여 지적하듯, 북한은 이제 중국의 위성국이 아니라 러시아와 혈맹 관계를 맺은 독자적 전략행위자로 부상했다. 과거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중국뿐"이라는 전제 자체가 붕괴한 것이다.


② 핵무력 고도화와 헌법적 제도화

북한은 2012년 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한 데 이어, 2023년 9월에는 핵무력 정책을 헌법 본문에까지 추가했다. 핵을 "국가의 기본법으로 영구화"한 것이다. 이제 비핵화를 전제로 한 어떠한 협상도 북한의 헌법 체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비핵화는 협상의 의제가 아니라 체제 붕괴의 신호로 읽힌다.


③ 대북 봉쇄 하에서의 생존 경험

북한은 초강도 국제 경제 제재를 20년 넘게 견뎌내며 비공식 무역망, 북중 접경 물류, 러시아와의 군사·노동 맞교환 등으로 체제를 유지해 왔다. 가혹한 봉쇄 속에서도 정권이 유지된다는 경험은, 남북경협이나 통일 담론에 의존해야 한다는 절박성을 근본적으로 희석시켰다. (다만 북한의 식량 상황은 여전히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으며, 과거 대기근 수준의 위기를 모면하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④ 국력 격차에서 오는 역설적 반응

GDP, 국제 위상, 문화 영향력 등 모든 지표에서 남한은 북한을 압도한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북한 지도부에게는 통치의 위협 요인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인민들이 남한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기 시작하는 순간 체제 서사가 흔들린다. 한국을 "이질적인 적대국"으로 재규정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체제 정체성 관리를 위한 조직심리학적 선택이다. 이번 당대회에서 '민족'이라는 단어가 사라진것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⑤ 미국과의 직거래 전략

김정은은 이번 선언을 통해 한국을 완전히 배제하고 트럼프와의 직접 거래 구도를 구축하려 한다. 정전협정 해제도, 제재 해제도, 한반도 평화협정도 한국이 아닌 워싱턴이 결정한다는 냉혹한 현실 인식에 기반한 전략이다. 이재명 정부가 아무리 유화 제스처를 보내도, 북한의 대전략적 틀 안에서 한국은 협상 상대가 아닌 전략적 장애물일 뿐이다.


3. 이재명 정부의 대화 제스처는 왜 '기만'으로 읽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의 대북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 그 진정성이 '기만'으로 독해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한미동맹은 유지되면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은 계속된다. 한국군의 대북 억제 체계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평양의 눈에는 이렇게 보인다. "대화는 한국이 말하고, 군사적 결정은 미국이 한다." 남한은 정책 자율성이 제한된 행위자이며, 그 자율성의 한계야말로 대화 약속의 불가역성을 구조적으로 보장할 수 없게 만든다.


북한이 지난 30년간 학습한 패턴도 있다. 남북 정상회담→합의→정권 교체→노선 급변. 이 사이클이 반복될수록 신뢰의 제도화는 요원해진다. 문재인 정부의 판문점 선언도, 9·19 군사합의도 결국 다음 정권에서 휴지조각이 되었다. 북한의 불신은 감정적 불신이 아니라 구조적 불신이다.


협상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상대를 '기만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협상의 도덕적 고지를 선점하고 추후 더 많은 양보를 끌어내기 위한 전술이기도 하다. 즉 북한의 '기만' 발언은 전술적 선제 포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북한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구조적 현실이기도 하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대북 정책의 설계는 표류한다.


4. '중국 중재론'의 환상


일부 언론과 정치권 일각에서 트럼프의 방중이 북미대화의 촉매가 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는 냉정하게 말해 희망적 사고의 과잉 투사다.


트럼프는 언제나 직접 거래를 선호했고, 중국을 경유하는 다자 구도를 통해 성과를 나누는 방식을 싫어한다. 북한 역시 중국이 중재하는 구도를 원치 않는다.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도 마찬가지다. 북한 체제의 완충지대 역할을 유지하면서도 북한이 미국과 수교하거나 제재가 해제되는 것을 원치 않는 베이징으로서는 적극 중재자를 자처할 유인이 없다. 게다가 북한에 대한 중국의 레버리지 자체가 북러 밀착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약화된 상태다. 중국이 압박을 강화할수록 북한은 러시아 쪽으로 더 기울 뿐이다. 미중 전략 경쟁의 큰 틀에서 보더라도, 중국이 미국을 도와 북핵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림은 전략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중국이 능동적 중재자로 나서는 시나리오는 딱 하나다. 북한의 도발이 자국의 안보 환경을 직접 위협하거나 미중 관계에서 결정적 불이익을 초래하는 극단적 상황이 현실화될 때다. 그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트럼프의 방중이 북미대화로 이어진다는 논리적 연결은 매우 빈약하다.


5. 정부가 해야 할 일


청와대에 찬물을 끼얹은 이번 선언 앞에서, 정부는 대북 정책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첫째, '통일' 담론에서 '평화 공존' 담론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해야 한다. 통일부를 '평화공존부' 혹은 '남북협력부'로 개편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시점이 되었다. 헌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도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북이 통일 담론을 구조적으로 폐기한 상황에서, 우리만 일방적으로 통일의 꿈을 유지하는 것은 정책의 현실성을 훼손한다.


둘째, '도발 억지'를 대북 정책의 1순위로 격상해야 한다. 대화가 요원한 상황에서 북한의 도발만 막아도 이재명 정부 임기 내 대북 관계는 관리 가능한 수준이 된다. 역설적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현실적인 목표는 '평화 구축'이 아니라 '위기관리'다. 올해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수위가 어느 방향으로 정해지느냐에 따라 서해에서의 군사적 긴장이 임계점을 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트럼프-김정은 직거래가 성사되는 경우를 대비한 '코리아 패싱' 방지 전략을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북미가 한반도 문제를 한국을 배제하고 논의하는 구도가 현실화될 경우, 이는 안보 주권의 심각한 훼손이다. 워싱턴과의 사전 조율 채널을 제도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넷째, 민간 차원의 인도적 교류와 문화 접촉의 통로는 작게나마 열어두어야 한다. 국가 대 국가의 공식 채널이 막혔을 때, 인적·문화적 접촉은 분쟁의 위험을 낮추는 완충재가 된다.


김정은의 이번 선언은 한반도 질서의 역사적 분기점이다. 이를 일시적 강경 발언으로 축소하거나 향후 협상을 위한 수사로 가볍게 흘려버리는 것은 값비싼 실수가 될 것이다. 북한은 영구 분단을 국가 전략의 완성으로 선택했다. 통일은 낭만이자 환상으로 폐기되었고, 핵만이 체제 보존의 유일한 보험이 되었다. 우리의 대북 정책도 그 냉혹한 현실에 맞는 논리로 재무장해야 한다. 문을 계속 두드리되, 그 문이 당분간 열리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민간 교류의 작은 불씨 하나를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국면에서는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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