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이 쌓은 방조제 위에, 현대차 AI 도시를 짓다

1991년 첫 삽, 2026년 두 번째 삽 — 두 삽질 사이 35년의 의

새만금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장면을 떠올린다.

갯벌을 뒤덮은 육중한 방조제, 그리고 그 안에 텅 비어 있던 땅. 단군 이래 최대 간척사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1991년 11월 착공했지만, 이후 30년 넘도록 새만금은 '완성됐는데 쓸모없는 땅'이라는 조소를 받아왔다. 이재명 대통령도 직접 "30년 동안 전체 면적의 40%밖에 매립하지 못했다"라고 탄식했을 정도다.

그런데 올해 2월, 국면이 바뀌었다.
현대차그룹이 새만금에 9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AI 데이터센터에만 5조 8000억 원, 그 위에 로봇 제조 클러스터와 수전해 플랜트, 대규모 태양광 발전 시설이 더해진다.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집행될 이 투자의 상징성은 금액보다 더 크다. 이 땅을 처음 만든 회사와, 그 땅을 다시 채우려는 회사가 같은 계보에 있기 때문이다.

1991년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서 현대건설은 핵심 시공사였다. 해상 매립과 연약지반 처리, 최종 물막이 공사까지 사실상 전 공정에 참여했다. 이 현대건설의 뿌리는 정주영 명예회장이다. 그는 서산 방조제 끝막이 공사에서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살을 막은 사람이다.

불가능하다는 말에 "해보긴 해봤어?"라고 되물었던 사람. 그 방법론이 그대로 새만금으로 이어졌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다. 세대 차이로 따지면 35년. 할아버지가 갯벌에 돌을 쌓아 국토를 넓혔다면, 손자는 그 땅 위에 GPU와 전선을 깔겠다고 한다. 도구는 달라졌다. 그러나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먼저 가겠다'는 방향은 닮아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맹점이 있다. '정 씨 가문의 서사'로만 읽으면 이 사건의 본질이 흐려진다. 현대차의 새만금 투자는 낭만적 귀환이 아니다. 냉정히 보면, 미국 관세 협상에서 25%를 15%로 낮춘 데 대한 화답이고, 정의선 회장이 지난해 11월 선언한 125조 원 국내 투자의 첫 번째 실행 카드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과 AI 인프라 선점이라는 실리가 동시에 담겨 있다.

새만금이 선택된 이유 역시 낭만보다 물성에 있다.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달하는 부지. 높은 일조량. 정부가 2030년까지 구축하려는 10GW급 재생에너지 공급망. AI 데이터센터의 가장 큰 병목은 '전력'이다. 새만금은 그 전력을 가장 싸게, 가장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는 땅 중 하나다. 토지 수용 분쟁도 없다. 전부 국유지다.

정의선 회장이 엔비디아 젠슨 황 CEO와 확보한 블랙웰 GPU 5만 장이 이 데이터센터에 투입되면, 현대차는 자율주행 AI 학습 인프라에서 테슬라(H100 15만 개 수준)와 비슷한 무게급이 된다.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 AI 기업으로의 전환. 새만금 데이터센터는 그 전환의 물리적 증거다.

물론 회의론도 있다. 아직 MOU 단계이고, 착공은 2027년이 목표다. 새만금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들이 흐지부지된 전례가 있다. 이번 투자가 전북 경제에 실질적인 일자리로 연결될지, 아니면 데이터센터와 로봇 공장이 '첨단 고립 섬'으로 남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이 땅이 처음 만들어질 때와 지금 사이에 분명히 달라진 것 하나는 있다. 용도가 바뀌었다. 쌀을 위한 농지가 아니라, 전기와 데이터를 위한 플랫폼으로. 그 전환이 우연이 아니라 새만금이 원래부터 가진 '규모의 잠재력' 때문이라면, 이 땅은 실패한 게 아니었다. 그저 시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건설이 쌓아 올린 돌이 새만금의 뼈대가 됐고, 이제 그 위에 현대차가 데이터와 로봇의 씨앗을 심으려 한다. 두 삽질 사이의 35년은 낭비가 아니었다. 다음 시대에 맞는 언어를 찾는 데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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